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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 못하는 사람입니다” 청춘, 반격의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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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 못하는 사람입니다” 청춘, 반격의 커밍아웃

입력
2016.10.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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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 실수담ㆍ이직 고민 털어놓고

서로 응원하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위안

획일적 능력중심 사회에 반기

다양성 반영된 평가기준 마련해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홍보용 명함을 업체에 맡겨 인화까지 했는데, 받아보니 로고 철자가 뒤바뀌었네요. 무려 200장이나… 저 어떻게 하나요. ㅜㅠ”

“이메일 보내기 전 상사가 일일이 수정까지 해 줬는데 정작 원본을 보내 버렸어요. 왜 이러고 사나 싶어요.”

“내일이 휴가 마지막이에요. 왠지 출근하면 뭔가 실수해서 혼나지 않을까 걱정이 들어요. 불안해요…”

누가 감히 이들에게 ‘루저’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굳이 신입사원, 초보, 미숙련자만의 경우라 특정하지 않아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일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이런 경험, 감정을 함부로 털어놓기란 쉽지 않다. 뭐든 당차게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을 우대하는 ‘능력 중심’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는 왜 실수투성이 일까요’ ‘왜 나만 못하죠’ ‘능력이 없나 봐요’와 같은 의기소침을 내비치는 건 나 스스로를 ‘일 못하는 사람(줄여서 일못)’으로 낙인 찍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을 깨고 나선 이들이 있다. 심지어 모임도 만들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일못이라 ‘커밍하웃’ 하고 실수담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가 하면, 자괴감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일못들을 위로하는 일못들의 천국, 이름하여 ‘일 못하는 사람들의 유니온’(일못유)이다.

일못유는 지금은 대학원생인 여정훈씨가 만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 상의 소통공간이다. 정훈씨도 한때는 직장인이었다. 1년여 근무했던 직장에서 숱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내가 정말 일을 못하는구나’ 자각했고, 곧장 그만뒀다. 당시 그는 자신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디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란 푸념도 입에 달고 살았다.

정훈씨는 그런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댓글로 공감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나 둘 끄집어내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모이면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정훈씨가 페이스북에 일못유 페이지를 개설한 게 출발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못유에는 현재 9,0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일못유에는 자신의 실수를 하소연하는 글도 올라오지만, 때론 진지하게 이직을 고민하거나 우울증 치료 방법 등을 묻는 질문도 올라온다. 실제 “항우울제나 항불안제 등 정신과 약 드셔보신 분 계신가요? 부작용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라는 글에는 순식간에 댓글이 37개나 달렸다. 댓글을 단 사람들은 대부분 “먹어봤는데 ~했다. 참고했으면 좋겠다” 등으로 실제 항우울제를 복용해 본 경험을 털어놨다.

고민 끝에 퇴사를 결정한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을 응원해달라며 올리는 글도 종종 눈에 띈다. 일못유 회원인 직장인 이연욱(30ㆍ가명)씨는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나의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를 안다”며 “그래서 일못유에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따뜻하게, 더 깊게 잘 와 닿는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 김지현(28ㆍ가명)씨도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일못유를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지현씨는 “상사들은 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돈 주는 만큼’ 일하라고 하는데 돈 주는 만큼이 도대체 얼마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잴 수도 없는 그 수치 때문에 나를 ‘밥값도 제대로 못하는 식충이’로 몰아세우는 게 너무 싫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말을 반복해 들으며 자괴감에 빠졌었는데, 일못유에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를 깨닫고 정서적으로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일못유가 SNS상의 실체 없는 그룹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난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라는 게 김씨의 자랑이다.

회원수가 늘면서 가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못유는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하는 공간인 만큼 100% 익명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때문에 가까운 지인을 비롯해 직장 동료와 상사를 우연히 이곳에서 마주치는 일이 간혹 발생한다. 한 일못유 회원은 “한참 상사한테 혼나고 힘들어 하던 시기에 일못유에 가입했는데, 여기서 회사 상사가 올린 글을 봤다”며 “나를 혼낼 때는 정말 너무 미운 대상이었는데 ‘그 또한 스스로를 일못으로 생각하는구나’ 싶어 애처롭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하직원을 구박하던 상사도 결국 회사 일에 지쳐 위로 받길 원하는 또 하나의 일못이었던 셈이다.

갈수록 능력에 따른 대가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능력 중심주의 사회에서 일을 못한다는 건 치명적이다. 때문에 일못유에서도 간혹 ‘열심히 하긴 하느냐’ ‘일 못해서 민폐인 줄 알면 그만둬라’ ‘변명일 뿐이다’처럼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당당하게 스스로를 일못이라 드러내는 건, 획일화된 잣대로만 판단하는 잘못된 능력 중심 사회에 저항하고픈 마음 때문이다.

이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일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다 보니 흥미를 붙이지 못해 그런 사람도 있고 상사를 잘못 만나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누군가 일을 못하거나 미숙하게 행동하면 그 이유나 원인을 생각하기 보단 무조건 일못으로 분류하고 채찍질 하기 일쑤다.

여정훈 씨는 “보통 사람들은 실수를 하거나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자책하곤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사람에게 가해지는 업무의 양과 질이 문제일 때도 있고, 서로를 돌보지 않는 직장 분위기 때문일 때도 있다”고 말했다. 본인의 의도나 능력과 별개로, 주변 환경이 개인을 일못으로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도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모든 걸 잘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능력이 없다고 사회에서 배제되어서도 안 된다”며 “각자의 능력이 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장단점을 갖게 마련인데, 우리 사회는 이를 무시하고 모든 걸 획일적인 기준으로만 평가해 많은 이들을 패배자, 열등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며 “속도, 효율, 경쟁만 강조하기 보단 개인이 적성을 찾을 기회를 주고, 다양한 평가 기준을 마련하는 등 구조적인 변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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