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억 예산 받아 ‘짝퉁 보고서’
“2013년 서해 지진에…” 해명 불구 해저 지질구조 몰라 부실 결과만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2012년 한반도 동부 지진발생 지역의 토양 특성을 조사하겠다며 정부에서 무려 70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국책사업에 맞먹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2년 뒤 연구원은 ‘한반도 동부지역 잠재적 위험 지진원 평가’ 제목의 보고서를 미래창조과학부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사달이 난 것은 경북 경주 지진 때문이었다.
지난달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인 경주 지진이 발생한 뒤 이 보고서를 찾아 읽은 전문가들은 그만 아연실색했다. 참고할만한 내용을 떠나 동부 지역 지진원에 대한 조사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보고서는 서해 백령도와 충남 보령 등 서부 지역의 내용만 있고 동부는 쏙 뺀 ‘짝퉁 보고서’였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연구원은 70억원짜리 보고서의 제목과 연구 개요에는 부산, 울산, 경남 일대 등 올해 대규모 지진이 잇따라 발생한 동부지역이 연구 대상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보고서의 실제 내용은 백령도와 보령 인근 해역을 다루고 있다. 연구원 측은 제목과 내용이 달라진 경위에 대해 “2013년 백령도와 보령에 지진이 각각 15회와 30회 이상 일어났다”며 “지진원 특성을 빨리 규명하기 위해 연구 대상 지역을 바꾼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연구원이 보고서 제목은 그대로 두고 내용만 바꾼 건 미스터리였다. 이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재승인 절차를 피하기 위한 꼼수로 드러나고 있다. 연구주제를 변경하려면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을 통합ㆍ지원 하는 연구회에 보고하고 승인을 다시 얻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회피하기 위해 연구원은 연구의 세부 항목을 바꾸었다. 연구원 측은 “연구 대상 지역 변경은 주제가 아닌 세부 항목을 바꾼 것이라 연구회 승인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보고서의 서부 지역 연구도 부실했다. 연구원은 백령도와 보령 등 서부 일부 지역의 지진 발생 특성을 파악했다고 했지만, 해저 지질구조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조사마저 미흡하게 이뤄졌다. 연구원 측은 “해저지질 구조 파악은 별도로 수 백억원이 드는 사업이라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다”고 했다.
겉과 속이 다른 짝퉁 보고서를 갖고도 연구원은 2014년 99% 이상 목표 달성도를 이뤘다는 평가와 함께 최종 승인을 받았다. 연구원이 추천한 교수 5명과 외부박사 2명으로 구성된 평가위원들이 눈감고 내린 결론이었다.
연구원은 이번 경주 지진 발생 뒤 2017년 주요 사업 계획에 이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지진 연구를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 5년 전과 같은 짝퉁 조사가 아닌 진짜 보고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경주 지진 이후 드러나고 있는 정부의 부실한 지진 대비와 관련 기관의 도덕적 해이의 심각성을 고스란히 보여준 단면들이다. 박홍근 의원은 “혈세 수 십억 원을 들여 제목과 내용이 딴판인 보고서를 만들고, 이를 버젓이 우수 보고서로 둔갑시키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연구원은 문제의 보고서에 동부지역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확인 결과, 보고서에는 지진이 발생 시 울산~부산의 지반 중 어디가 올라오고 내려가는지에 대한 시뮬레이션 조사 1개가 있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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