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자료 있나” “있으면 공개를”
정보위서 이병호 원장 상대로
與, 돌아가며 유도성 질문만 거듭
북한ㆍ대외 안보 문제 다룬 시간
전체 6시간의 3분의 1도 안돼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의 ‘송민순 회고록 사견 발언’의 본질은 그의 발언이 ‘확신’이냐 아니면 ‘인상평가’냐에 있지 않다. 발언 하나를 듣기 위해, 또 이를 반박하기 위해 여야는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안보문제를 진단할 국정원 국감의 역할을 스스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들의 유치한 말싸움 만 전해 들어야 했다.
20일 정치권과 국정원 등에 따르면, 전날 진행된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원 국감에서 안보 문제를 다룬 시간은 전체 6시간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국정원 업무보고와 북한 동향보고에 1시간30분을 할애한 게 전부다. 나머지 시간은 회고록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는 새누리당의 끈질긴 압박과 야권의 이의 제기로 소비됐다. 압권은 당 중진들이 대거 포진한 여당의 질의 방식이었다.
새누리당 정보위원은 최다선(8선)인 서청원 의원을 필두로, 정진석 원내대표, 원유철 전 원내대표와 재선의 이완영 간사까지 4명이다. 복수의 참석자 말을 종합하면 이들은 모든 질의에서 “회고록 관련 자료가 있냐”, “있을 것 아니냐 공개하라”는 질문만 돌아가며 반복했다. 정보위 관계자는 “현장 중계가 없는 비공개 국감이다 보니 여당 중진들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이 원장을 가둬놓고 돌아가며 때리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여당 의원들이 임무를 관철하려는 ‘독일 병정’처럼 움직였다”며 “마지막까지 측은하고 처절할 정도로 이 원장의 입에 매달렸다”고 주장했다.
결국 하루 종일 버티던 이병호 국정원장의 입은 저녁 무렵 열리고 말았다.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노무현정부가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과정에서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가 북한 의견 타진 안을 수용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야의 논쟁은 이 원장의 이런 발언을 두고 장외에서 계속됐다. 국감 과정을 설명한 여야의 두 간사들은 두 차례 브리핑에서 볼썽사나운 설전을 이어졌다. 여당의 이완영 간사는 “이 원장의 모든 발언의 서술어가 ‘~했다’는 확신”이라고 주장했고, 김병기 민주당 간사는 “이 원장 발언에는 모두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상식적으로’라는 전제가 붙었다”고 반박했다. 말 토씨 하나를 가지고 얼굴을 붉힌 이들은 브리핑을 마치고서도 자당 출입기자들을 따로 불러 수 차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들의 지루한 입씨름에 취재진은 밤늦도록 실체 파악에 매달렸지만 실패했고, 미완의 보도를 해야 했다. 결국 여야는 속기록을 보고 누가 옳았는지를 따지겠다는 코미디 같은 결론을 내렸다.
새누리당은 파행국감에 대해 회고록 파문이 워낙 큰 현안이라고 항변했다. 원 전 원내대표는 “회고록 파문이 국가 중대 사안이라 당연히 (집중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며 “국정원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대한민국 체제를 수호하는 것인데 (문 전 대표가) 북한 정권에 결재 받았다면 당연히 국정원에도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안의 경중을 따져도 새누리당의 변명은 궁색해 보인다. 10년 전 일을, 그것도 국정원장의 한 마디를 듣는 것이 북핵 위협 앞에 놓인 국민 불안보다 앞설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원장의 사견 발언 논란은 국정감사의 속기록만 확인하면 끝날 사안이다. 한쪽은 분명 브리핑을 통해 거짓말을 했고, 진실이 드러나면 혼란을 부른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한다. 국민 마음에 겹겹이 쌓여 있는 정치 혐오는 괴담이 아니라 이런 정치가 만든 실체적 진실이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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