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전화통화가 많지 않은 고향의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폰7 이번 주 금요일 나온다더라. 네가 나 대신 줄 서서 한 대 사와. 돈은 줄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거기를 왜 가? 내가 쓸 것도 아닌데."
"난 그날 출근하잖아. 잔말 말고 그날 나온 거 사와."
정리하면 이렇다. 금요일인 21일 애플의 새 '아이폰7'이 출시되는데, 그날 자기가 쓸 아이폰7 한 대를 대신 사오라는 것이다. 동생은 이동통신사 약정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유심 카드를 바꿔 끼울 이른바 ‘언락폰'이 필요한 상황. 보통 아이폰이 새로 출시되는 날 오전에는 제품을 구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니 백수로 놀고먹는 오라비를 부려먹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마치 불시에 습격을 받은 것처럼 그저 혀만 차고 있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배우 오광록이 읊조리던 대사 한 줄이 떠올랐다.
"아무리 백수라도 그런 고생을 하지 않을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
“이 정도면 되겠지?" 얼리버드 생초보의 준비물
다시 전화해 못 하겠노라 말할까? 새벽같이 집을 나서서 현란했던 상점들도 숨을 죽인 어두운 거리 한복판에서 추위와 지루함에 몸과 스타일을 구겨가며 오전 8시를 기다리는 일이라니... 동생아. 아이폰7을 향한 사람들의 열기가 한 꺼풀 식은 뒤 편하게 구입하면 안 되겠니?
그러다 가만 생각해보니 지난 5년 동안 기자로 일하며 아이폰 출시 대기 행렬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얼리버드 행사는 좋은 소재다. 대기열에 참여하지 않았다 뿐이지 새벽같이 나가 대기줄과 함께 호흡했다. 말하자면 얼리버드 대기줄에서 나는 그저 주변인에 불과했을 뿐이다. 이 기회에 직접 그 축제의 줄 안으로 들어 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떤 이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줄을 서기도 한다지 않나. 대단찮은 백수가 몇 시간 밖에서 줄 서는 것 따위 어려울 것 없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동생에게 전화를 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대신 무엇을 준비해야 안전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방한복이 필요할 것 같았다. 취재 경험상 새 아이폰이 국내 출시되는 10월 하순의 새벽 공기는 온몸에 불현듯 스며들며 체온을 앗아간다. 얇은 패딩 점퍼 한 벌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또, 명동의 길거리에서 앉거나 서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개똥밭에 굴러도 아쉽지 않을 운동복을 입기로 했다. 발의 온기를 유지해줄 부츠도 챙기고, 완전히 충전된 스마트폰과 스마트폰 보조 배터리도 필수다. 기다림 속에서는 스마트폰이 유일한 친구가 돼 줄 터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 응용프로그램도 설치했다.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그만 줄을 탈출하고 싶어질 때가 오면, 드라마나 영화에 눈을 돌려 잠시 문화의 세계로 도망해 볼 요량이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지만, 캠핑용 의자도 있으면 좋다. 대기줄 특성상 매장이 문을 열기까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가볍게 깔고 앉으면 그만이다. 캠핑용 의자 따위는 없으니 대신 돗자리를 챙겼다. 함께 기다리는 앞뒤 사람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다. 마지막으로 다소 거추장스럽지만 랩톱도 챙겨가기로 한다. 언제 어디서나 일을 받아 곧장 처리할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리랜서(백수)의 자세 아니겠는가.
밤 9:40. 자, 떠나자. 축제의 현장으로
그래서 어디로 떠난담? 인기 매장만 피하면 그리 오래 줄을 서지 않고도 제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줄을 서고 진을 치는 진풍경은 일부 인기 매장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가장 긴 대기줄을 볼 수 있는 명동의 한 매장으로 떠나기로 했다. 기왕지사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얼리버드 체험, '끝판왕' 인기 매장에 가는 것이 도리 아닐까. 준비물을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은 목요일 밤 9시 40분 집을 나섰다.
그러나 긴 줄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10시 15분쯤 매장 앞에 당도했는데, 대기 인원은 7명뿐이었다. 무려 8등이라니. 앞줄에 서게 됐다는 사실을 기꺼워해야 하는지, 부족한 대기인원에 민망해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이곳에서 열린 얼리버드 행사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전날 밤에 도착한 이들도 대기번호 100번을 넘기는 게 보통이었다. 해가 갈수록 분위기가 많이 수그러지고 있다. 리셀러(총판) 매장보다 상대적으로 통신사가 진행하는 얼리버드 행사로 사람들이 몰려서다. 리셀러 매장에서는 일찍 도착한 구매자에게 별다른 선물을 주지 않지만 통신사에서는 2년 통신비 무료 등 귀가 솔깃한 제안을 내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굳이 새벽이슬을 맞지 않아도 하루 정도만 지나면 쉽게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도 매년 얼리버드 대기줄의 길이를 줄이고 있다.
밤 10:30. "집에 갔다 다시 오세요"
10시 30분이 되자 매장 안에서 한 무리의 직원들이 나왔다. 큰 소리로 소리치는 매장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번호표 나눠드립니다. 이거 갖고 다른 데 가서 쉬고 계시다가 6시 30분 이전까지 오셔서 다시 기다리시면 됩니다."
이게 무슨 소리요. 직원 양반. 얼리버드 행사는 밤샘 행사가 아니라는 말이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조금 김이 빠져버렸다. 7번, 9번 대기자와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런 새벽을 기대했는데, 모두 물거품이 돼버렸다. 처음이자 마지막 얼리버드 체험이라고 생각해 돗자리와 방한복까지 챙겼다는 사실이 허탈했다. 준비해 온 준비물들은 모조리 쓸모 없는 짐짝이 되어버렸다. 작은 번호표와 함께 우리의 작은 축제는 그저 명동의 밤거리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번호표를 받고 정해진 시간에 모이도록 하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추운 날씨에 새벽 공기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사용자들의 불편을 생각한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 다시 모이도록 해 대기 시간을 최소화하겠다는 의미다. 또, 상가가 밀집한 명동 특성상 주변 상인의 불만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텐트나 낚시 의자 등 고급 장비가 동원되는 2박3일짜리 얼리버드 대기줄을 보기 어렵게 됐다는 게 매장 직원들의 설명이다.
오전 6:20. 다시 매장 앞으로
24시간 운영하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약속된 시간에 맞춰 매장 앞으로 나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기행렬에 모여 있었다. 8번 번호표를 보고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8번 정도면 잠시 후 등장할 다양한 언론사의 카메라 세례를 피할 수 없으리라. 얼굴을 가려야 하나? 창피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당당히 있기로 마음먹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 행사는 애플 팬들의 극성이라기보다는 작은 축제이기 때문이다.
“얼리버드 자주 오셨어요?"
준비한 돗자리를 깔고 능청스럽게 앞에 서 있는 이에게 말을 붙였다.
“아뇨. 친구 따라 왔어요."
이날 얼리버드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아이폰7을 두 개 이상 한꺼번에 구입할 수 없다. 그는 결혼을 앞둔 가족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이폰7을 4대나 구입해야 하는 친구를 돕느라 따라나선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 자신이 쓸 것도 아니고 친구를 위해 새벽같이 길을 나선 친구의 우정은 애플 대기줄 사이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동생의 ‘명령’으로 대기줄에 선 누구의 처지와 비슷하기도 하고. 마치 줄줄이 엮인 굴비처럼 여러 사람 고생시키기로는 애플만한 기업이 또 없을 것이다.
오전 7:59. 개점 초읽기 “5, 4, 3, 2, 1"
매장문이 열리는 오전 8시가 가까워지자 대기줄 여기저기서 들뜬 마음이 앞줄까지 퍼진다. 시계의 바늘이 8을 향해 달음질 칠수록 대기줄의 꽁무니는 더 길어진다. 40여 명에 불과했던 대기인원이 어느 틈에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대학생이라는 1등 대기자부터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구입하기 위해 들렀다는 32번의 남자까지. 대기줄에 서 있는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8시가 되기만을 기다린다.
“5, 4, 3, 2, 1! 고생 많으셨습니다~"
직원중 목소리가 가장 커서 휴대용 스피커를 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직원이 큰 소리로 소리친다. 10부터 0까지 숫자가 하나씩 내려갈수록, 매장의 유리를 가린 블라인드도 한 칸씩 올라간다.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환호한다. 1등 대기자도, 8등 대기자도 환호하며 질서 있게 매장으로 입장한다. 신문사와 방송사의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1등으로 신용카드를 긁는 이는 집중 조명을 받는다. 다음엔 줄을 서더라도 1등만은 피해야지. 혹시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전날 밤 10시부터 시작된 조용한 축제는 환호로 마무리됐다.
오원석 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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