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곧 팩트는 아닙니다. 기억이 곧 기록인 것도 아니고요. 나 자신의 기억은 머리 속에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으니까요. 경험과 느낌도 중요하지만 기록으로 가치를 지니려면 객관적 검토가 바탕이 돼야죠.”
정보ㆍ기록 전문 활동가인 전진한(42) 알권리연구소장은 20일 한국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훌륭한 회고록의 요건으로 ‘객관적 기록ㆍ사실의 전제’ 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알권리연구소는 2015년 출범한 협동조합이다. 전 소장은 2002년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에서 정보공개운동의 물꼬를 텄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창립에 참여했고 사무국장, 센터장 등을 지냈다. 최근 역대 정부의 대통령기록 실태를 다룬 책 ‘대통령 기록전쟁’(한티재)을 냈다.
전 소장은 “좋은 회고록을 쓰려면 우선 관련자 취재를 하거나 객관적 기록을 확인해야 한다”며 “보통 같이 회의를 해도 참석자마다 당시를 기억, 이해하는 바가 모두 달라 회의록을 회람시키면 이의제기가 나오지 않냐”고 했다. 즉 주요사건을 기록하는 태도가 솔직해야 하고, 이를 위해 기록, 취재, 교차확인 등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대부분 그런 내용이잖아요. 서로의 기억이 달라서 벌어지는 일. 본인의 기억에 대한 자신이 없다면 회고록을 쓸 때도 기자처럼 취재를 해야죠. 당시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그는 이런 요건을 갖춘 회고록으로 5공, 6공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꼽았다. 박 전 의원은 다이어리 20권과 수첩 120권의 기록을 토대로 전두환 정권의 내막을 기록했다.
회고록을 일종의 ‘출마의 변’, 출사표로 삼는 한 객관적 기술이 어렵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전 소장은 “전직 공무원은 국가안보, 외교관계 등에 타격을 줄 만한 내용을 당대에 누설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데 이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회고록을 새로운 정치적 계기, 발판으로 삼는 경우 폭로, 파장, 파문으로 주목을 끌고 자신은 합리화하려는 유혹이 커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회고록은 주로 합리화, 자랑, 변명으로 점철된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이가 체계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제도와 문화는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정치’가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 무책임의 구조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위해선 기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최규하 전 대통령만해도 5ㆍ18과 관련해 굉장히 중요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끝까지 입을 닫았죠. 앞으로도 기록이 빌미가 되고,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고, 자꾸만 ‘(15년간 비공개인)대통령 기록물을 열어보자’ 하는 등의 태도를 고치지 못하는 한 누구든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미국 국가기록원(NARA)은 늘 자료를 확인하려는 이들로 북적이고, 독일은 나치 전범 등 가해자의 기록도 중요하게 수집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혀 이런 기록의 훈련이 돼 있지 않다”며 “큰 사료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기록들이 차분히 쌓이려면 우선 정치적 목적의 활용이 자제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