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 왕 찰스 2세는 왕자 시절 청교도 혁명으로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망명지에서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된 지 11년 만에 왕이 되어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가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혁명 가담자를 모두 용서하고, 재산권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왕궁으로 들어설 때 품고 있었던 것은 찰스 1세 처형 판결에 간여한 법관 58명의 명단이다. 이 중 13명이 사형, 25명이 종신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해외로 탈출했다. 이미 죽은 청교도 혁명 주도자 올리버 크롬웰의 시체는 무덤에서 파내어 목을 잘랐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그 명단이 바로 ‘블랙리스트’의 어원이라고 헨리 홀트 어원사전을 인용해 적고 있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1980년대 경찰과 정보 당국이 노조활동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취업을 막아오다, 지난 2013년 법원으로부터 국가배상 판결을 받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차츰 기억에서 사라지던 블랙리스트가 다시 들리게 된 것은 이명박정부 때다. 정부의 친기업적 정책에 비판적이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당시 상황을 밝힌 2015년 칼럼에서 “동료 교수가 멋모르고 시국선언에 서명했다 당했던 온갖 불이익을 낱낱이 얘기해 줬다”고 적었다. 신청한 연구비마저 거절당한 후 항의하자, 돌아온 대답은 몇 년 동안은 참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단다. 반면 친정부적 발언을 한 교수에게는 “자리도 주고 연구비도 마구잡이로 뿌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이 같은 분위기가 현 정부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이 교수의 평가는 지금 와 생각하니 너무 점잖은 표현이다.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대통령의 수첩’이 화제였다. 첫 장관인사부터 의외의 인물 발탁이 거듭됐기 때문이다. 또 공공기관, 공기업, 금융기업 대표부터 국공립대 총장까지 추천된 인사들에 대한 청와대 재가가 특별한 이유 없이 늦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대통령의 수첩에 특별히 눈여겨보던 인물들이 담겨 있을 것”이란 추측이 무성했다.
그런데 최근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공개된 후 그 수첩이 바로 블랙리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만에 하나 사실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진짜 심각하다. 블랙리스트를 기준으로 인사를 한다는 것은 인사권자의 사감으로 특정 인사를 배제한다는 것이고, 결국 능력을 갖춘 인사를 적재적소에 쓸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이런 식의 인사가 한 두 번만 이뤄져도, 그 자리를 원하는 후보들은 대부분 소신을 발휘하기보다는 인사권자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몸조심 말조심을 하게 된다. 또 설사 능력을 갖춘 인사가 발탁되더라도, 소신과 전문성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분위기는 전염성이 강해 금세 조직과 나라 전체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게 될 위험성이 커진다. 사고는 옥조여지고, 시각은 좁아지며, 남다른 발상은 질식될 수 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올해 광복절 축사에서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고 있다며 “파괴적 혁신”을 통해 “과거에 없던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의 공포가 관료 학술계 문화 예술계를 억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파괴적 혁신’과 ‘과거에 없던 길’을 앞장서 제시할 것인가.
게다가 블랙리스트는 그 존재가 비밀이었을 때는 두렵지만,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반대파를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다. 지금 문화ㆍ예술계에서 일고 있는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요구가 그 증거다. 문화ㆍ예술계는 시작일 뿐이다. 그동안 이유도 모른 채 배제되고 탈락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결집한다면 현 정부의 남은 임기가 얼마나 험난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