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탄이다. SNS를 통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져 나오는 문화계 성폭력 고발에 놀랄 시기마저 놓치기 일쑤다. ‘#오타쿠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로 시작된 이 연쇄 폭로는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만화 문화ㆍ예술 전반에 걸쳐 무작위로 확산되는 중이다.
이런 계절에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심정이 만만치 않다. 신춘문예는 한국 문단에 새로운 피를 수혈할 시인, 소설가, 극작가, 아동 작가들을 뽑는 등용문이다. 문단 내 성폭력 사실을 고발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습작생이다. 이 등용문을 향한 그들의 뜨거운 눈빛이 가해자들의 먹잇감이 됐다. 시를 가르쳐주겠다, 좋아하는 작가를 소개시켜주겠다. 대중 인지도가 있든 없든 먼저 ‘문인’ 타이틀을 획득한 자들이 내미는 손은 지망생들에겐 구원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린 그들은 말 그대로 뛸 듯이 좋아한다. 알아봐주길 바라는 것.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건강한 사회적 욕구다.
“네가 문학에서 벽을 마주하는 이유는 틀을 깨지 못해서 그렇다. 탈선을 해야 한다.” 지금 SNS에서 다수의 고발자들에게 지목 당한 시인 B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미성년자 제자들에게 접근해 성추행,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너희 엄마와 친구가 되고 싶다. 너희 엄마와는 섹스하지 않을게” “낙태 시킨 아이들로 축구팀을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70세가 되면 어린 소녀와 사귈 것이다.”
고발 내용 중에 나오는 B의 말은 시어나 영화 속 대사와 비슷하다. 아마 그는 자신이 예술의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삶도, 말도 사회 통념에서 비껴나야 한다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소설보다 시에서 이런 류의 사건이 더 많이 불거지는 것도 시의 장르적 속성인 전복과 파괴에 있다는 시각이 있다. 일부 문인들이 그 속성을 내면화해 자신과 주변 사람을 전위예술의 소재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조차 자기 말에 속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 아래 있는 실상은 철저한 위계 다툼이다. 그들이 정말 자신의 혼을 갈아 넣어 예술을 해왔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파하고 싶었다면 왜 ‘찍소리’ 못할 사람들에게만 접근했을까. 성폭력 가해자들의 촉수가 움직이는 건 ‘그래도 되는 애’란 판단이 서는 순간이다. 그들의 말은 한결 같다. “절대로 문단에 발 들이지 못하게 해주겠다” 이건 예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다. 전위가 아니라 위계다.
피해자들이 그간 침묵했던 것은 일상이 전쟁터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공기처럼 만연한 성희롱, 성추행을 한 번만 참고 넘어가면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폭로를 보며 이들은 자신의 삶터만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이미 전쟁터임을 알게 된다. 지금 고발자 중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한 사람들도 있지만 타인에게 폭로의 용기를 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유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 성추행 고발에 업계 남성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몰랐다”이다. 그들은 몰라도 됐다.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게 그들이 가진 권리다. 모를 권리와 그래도 되는 애. 두 축 사이에서 수십 년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관련된 모든 이들이 여기에 대해 발언할 필요는 없다. 사회를 등지고 각자의 방에 머무를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최근 드러난 미술 관계자의 성폭력, 이어지는 동료와 관계자들의 방조자로서의 책임 통감과 진심 어린 사과가 담긴 유려한 입장 표명을 보고 있으면, 언어를 다루는 자들에게 언어의 효용과 시점에 대해 묻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어는 뭐고 문학은 도대체 뭘까.
문인단체를 여러 개 가진 나라에서 문학 지망생들의 성폭력 피해 사실에 대한 침묵은 기이할 정도로 무겁다. 세월호 참사와 최근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사회적 현안에 꼬박꼬박 성명서를 내왔던 한국작가회의는 사태 발생 후 근 일주일만인 24일에야 홈페이지를 통해 “조속하게 해당 회원들의 소명을 청취하여 절차에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을 올렸을 뿐이다.
이 나라에서 문학가를 지망하는 이들은 문인단체의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저 불편하며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을까. 신춘문예 시기를 묻는 사람들의 전화가 두렵기만 하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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