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권력형 비리로 靑 흔들리자
한달 넘게 뜸 들이다 전격 제안
국회 아닌 ‘박근혜의 개헌’ 선언
대선 전까지 정국 주도 시사
일격당한 야권 갈라질 가능성
박근혜 대통령이 또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박 대통령은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헌법 개정을 전격 제안해 정국을 발칵 뒤집었다. ‘개헌 빅뱅’은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60)씨와 미르ㆍK스포츠 재단 의혹을 비롯한 무수한 정치 현안을 집어삼키고, 다음 대선 판을 뒤흔들 것이다. “개헌은 국정의 블랙홀”이라며 개헌 논의에 반대해 온 박 대통령이 순식간에 입장을 바꿔 정국을 ‘개헌 블랙홀’에 몰아넣은 것이다. 급속한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 현상) 위기에 몰렸던 박 대통령은 개헌을 무기로 다시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됐다.
靑 “ ‘박근혜의 개헌’ 하겠다” 최후의 승부수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개헌을 주도해야 한다. 필요하면 박 대통령이 직접 개헌안을 내겠다”(김재원 정무수석)고 밝혔다. ‘국회의 개헌’이 아닌 ‘박근혜의 개헌’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새 헌법을 ‘2017년 체제’라 규정하고 “제 임기 안에 헌법 개정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 안에 개헌 조직을 설치해 국민의 여망을 담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내년 12월 대선 전까지 개헌으로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권력구조 재편을 중심으로 한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현직 대통령의 힘이 빠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그러나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차기 대선 주자가 없는 데다 박 대통령이 지지율과 리더십을 상당 부분 지키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자신했다.
김재원 수석은 “박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개헌 필요성에 공감해 왔다”며 “추석 연휴(9월 14~18일)에 종합적이고 최종적인 개헌 보고서를 올렸고, 박 대통령이 연휴 마지막 무렵에 개헌 준비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개헌 논의 본격화 입장을 정한 뒤 개헌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기를 고르기 위해 한 달 넘게 뜸을 들였다는 얘기다. 결국 박 대통령은 잇단 권력형 비리 의혹으로 청와대가 흔들리는 지금이 개헌 카드를 낼 최적의 타이밍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의혹들의 블랙홀’ 유발… 레임덕 탈피 노림수
청와대는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과 미르ㆍK스포츠 재단의 불순한 모금 의혹 등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박 대통령이 20일 최씨에 대한 검찰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음에도 의혹은 가라앉지 않았다. 또 청와대 국정감사(21일)가 끝난 뒤 새누리당에선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교체 요구가 터져 나올 분위기였다. 잇단 의혹과 청와대의 오만한 대응 탓에 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최근 20% 중반까지 떨어졌고, 대구ㆍ경북(TK)지역과 50대 이상 유권자 등 콘크리트 지지층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정권의 악재들은 개헌이라는 초대형 이슈에 단번에 묻힐 가능성이 상당하다. 개헌이 ‘청와대 의혹들의 블랙홀’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최씨 의혹을 비롯한 청와대 흔들기를 차단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서둘러 개헌 정국을 유도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온 대목이다. 야권 인사들은 ‘최순실발 개헌’이란 얘기까지 하고 있다.
반면 여권엔 개헌이 호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한 관계자는 “4월 20대 총선 이후 박 대통령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늘처럼 주목 받은 적이 있었느냐”면서 “대통령 임기 말 측근ㆍ친인척 비리가 레임덕을 재촉하는 상황을 일단 피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깜짝 개헌 제안 배경에 대해 “앞으로 정치 일정을 감안할 때 시기적으로 지금이 적기이고, 개헌 추진에 중심 역할을 할 국회의원 여러분 앞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략적 개헌 제안’이라는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야당 분열ㆍ여당 결집 포석… 정계개편 염두 설(說)도
박 대통령은 개헌 제의로 야당에 일격을 가했다. 야당은 ‘박근혜의 게임’이 된 개헌에 즉각 동참하는 것도, 찬성 여론이 압도적인 개헌 자체에 반대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이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정국 전환용 개헌 시도로 비판하면서도 개헌에 대해선 적극적 찬성도 명확한 반대도 아닌 어정쩡한 반응을 내놓았다.
개헌 이슈를 받아 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의원 등 야권 대선주자들의 입장은 저마다 달랐다. 개헌 여부와 추진 시기, 방향 등에 따라 각 주자의 ‘집권 가능성’이 달라지는 탓이다.
정치권 인사는 “야권 내 입장 정리가 쉽지 않은 이상, 개헌을 당분간 청와대가 주도할 공산이 크다” 며 “가뜩이나 원심력이 큰 야권이 개헌을 놓고 조기에 갈라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야권 세력의 개헌 이해득실이 복잡하게 나뉘는 만큼, 개헌을 매개로 ‘제3 지대론’이 힘을 받고 대선 주자ㆍ정치 세력 간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등 정계개편이 빨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개헌이 야권 분열의 폭탄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이 레임덕 위기에 몰린 데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가 없어 우왕좌왕했던 여권은 개헌을 고리로 뭉치는 분위기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개헌을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나섰다. 그간 개헌론에 불을 지펴 온 친박계는 본격적으로 움직일 태세다. 개헌 정국에서 박 대통령의 여당 장악력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다시 보는 '정윤회 파문' 결정적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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