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5일 비선실세라는 최순실씨에게 대통령 연설문이 사전 유출되고 일부 수정되기까지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취임 후 일정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을 물은 적이 있으나 청와대의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 그만뒀다”는 게 요지다. 전날 최씨 사무실 컴퓨터에서 대통령의 주요 연설문과 국무회의 발언, 인사자료, 당선 소감문 등 원고 44건이 확인됐다는 JTBC 보도에 대한 박 대통령의 공식 해명이다. JTBC 보도에 따르면 일부 연설문은 길게는 연설 사흘 전에 유출됐으며 최씨가 청와대로부터 연설문을 미리 받아 고친 흔적도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은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국민 여러분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다”고 했지만 공식 조직도 아닌 비선이 대통령 연설문에 손을 댄 경우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보지 못한 비정상적 국정 개입이다. 최씨와 청와대 일부 인사의 내통에 따른 국기문란 행위라는 추측과 달리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라는 점에서 국민이 받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관계 부처나 연설기록비서관이 연설문 초안을 잡고, 수석실이 다듬고 독회를 거치는 공식 경로 외에 비공식 경로를 따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 대통령은 스스로 국가 기강을 크게 무너뜨렸다.
더욱이 2014년 독일 드레스덴 연설과 같은 중요 외교정책 연설문이 최씨 같은 비전문가에게 손질됐다는 사실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또 인사 발표 전 유출된 청와대 비서실장 교체 자료나 수석비서관회의 문건 등이 컴퓨터에 들어있는 상황은 최씨가 “국정 논의 파트너”라는 야당의 추측을 명백한 사실로 확인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이 정도로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 어렵다.
청와대의 뻔뻔한 거짓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21일 국정감사에서 “최씨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라는 최씨 측근의 말을 두고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또 박 대통령과 최씨가 “아는 사이인 것은 분명하나 절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고 했다. 청와대의 말이 불과 나흘 만에 거짓으로 드러난 셈이다.
여당에서조차 “이건 나라도 아니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다. 최씨의 국정개입 전모를 철저히 밝히고, 청와대 비서실을 전면 쇄신해야 한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각성과 근본적 인식 전환이 아니고서는 스스로가 부른 ‘신뢰의 위기’를 헤쳐 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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