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 철회하라!’ ‘OOOO 강행하는 OOO은 물러나라!’처럼 4박자 운율에 공격적인 표현이 대세였던 시위 피켓에 변화가 일고 있다. ‘쌍팔년도’식 운율 맞추기 대신 ‘#(해시태그)’를 붙이거나 풍자와 유머를 통해 현실을 개탄하고 의혹을 꼬집는다. 과거에 비해 시위 주체가 다양해진 데다 온ㆍ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지고 정보 공유 범위가 넓어지면서 주장을 전달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온 것으로 풀이된다. 또 한편으론 청와대 비선실세와 관련된 의혹이 날마다 새롭게 불거져 나오는 현실에서 뻔한 규탄 구호보다 자조 섞인 신조어를 공유하는 편이 훨씬 통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순실씨 딸 특혜의혹으로 시끄러운 이화여대와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 故 백남기씨에 대한 부검영장 집행이 시도된 서울대 병원에서 포착한 시위 피켓에 대한 이야기다.
‘앗, 의혹이 발견되었습니다!’
17일 청와대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 특혜의혹 규명과 총장 사퇴를 촉구하는 이대생들의 시위에 등장한 피켓 문구다. 제출기한을 훌쩍 넘겨 과제물을 제출한 학생에게 “네, 잘하셨어요” “앗! 첨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꼬박꼬박 경어를 쓴 교수의 행태를 비꼬고 있다. 이 밖에도 ‘잘 키운 말 하나 열 A+ 안 부럽다’ ‘금메달, 다그닥, 성공적’ 과 같은 피켓 문구들은 언론과 SNS를 통해 퍼지며 주목을 받았다.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는 데 거칠고 과격한 구호 대신 톡톡 튀는 신조어와 위트 있는 풍자를 선택했고 결과는 일단 ‘성공적’이다.
이대생들 ‘최순실 딸’ 특혜 의혹에
말(馬)과 관련된 문구 들고 시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발췌한 문구
SNS 통해 퍼지며 주목받아
이대생들의 기지 넘치는 피켓 문구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물이나 댓글 중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문구를 발췌한 것들로 알려졌다. 기성세대에 익숙한 전통적 시위 문화의 공식을 배제하고 SNS세대의 일상적 문법으로 채운 피켓을 앞세워 구성원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호응을 얻어냈다. 이는 애초부터 학생회 등 조직에 의한 동원이 아닌 문제의식을 공유한 다수 학생의 자발적 참여로 시위가 이어져 왔기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짧은 호흡과 감각적 언어로 공감하는 데 익숙한 SNS 세대들은 4박자의 진부한 구호나 선동적 슬로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며 “시위 도중 걸그룹 노래를 함께 부르고 온라인에서 나눈 의견이나 조롱, 분노의 표현을 피켓에 활용한 것 자체가 시위문화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뜻한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비선실세들은?’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선 일부 의원의 손에 들린 ‘#’가 눈길을 끌었다. ‘#’는 연관된 정보를 묶기 위해 온라인에서 주로 쓰는 기호다. 대통령의 시정연설 도중 야당의원들은 ‘#그런데 비선실세들은?’‘#나와라_최순실’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었다. 최근 정부와 여당의 최순실 의혹 덮기에 맞서 SNS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런데최순실은 붙이기’ 운동을 오프라인 상으로 옮겨온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아무리 정당한 요구라도 진부한 방식의 표현을 쓴다면 공감대는커녕 거부감만 커진다”며 “인터넷과 SNS를 중심으로 시대가 바뀌고 있는 만큼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진화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장병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는 물론 장년층까지 SNS를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 같은 온라인 언어를 활용한 메시지 전달 방식은 갈수록 많은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국회선 의원들 ‘#’붙은 피켓 시위
“시대 바뀌어 메시지 전달 방식도 진화”
‘우리가 백남기다’
25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故 백남기씨의 부검을 반대하는 시민 수백 명이 경찰의 부검영장 집행시도에 맞서 ‘우리가 백남기다’라는 피켓을 동시에 들어 보였다. 고인의 초상이 함께 그려진 피켓은 ‘부검 반대’ 나 ‘살인정권 규탄한다’에 비해 여리고 차분해 보이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강한 연대의 의지를 담고 있다.
병원 앞 ‘우리가 백남기다’ 피켓 든 시민
공감ㆍ 연대 통해 “굴하지 않을 것” 다짐도
‘우리가 OOO다’의 시초는 지난해 1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테러 이후 등장한 슬로건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이다. 한 패션 스타일리스트가 ‘테러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트위터에 올린 이 슬로건은 순식간에 퍼지며 지구촌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 후 IS(이슬람국가)에 의해 피살된 일본인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를 추모하는 ‘나는 겐지다’를 비롯해 ‘#나는 페미니스트다’를 거쳐 ‘우리가 모두 성주입니다’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까지 이어졌다. 특히 18일 열린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대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촉구 기자회견에서는 블랙리스트 지목을 감격해 하는 역설적인 풍자 만화 피켓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구호 대신 문제의식 공유와 공감대 형성을 통한 세상 바꾸기는 가능할까, 피켓의 변화가 주목된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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