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처음에는 수상한 재단을 만들어 이권을 챙기려는 인물로 의심을 받았으나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배후에서 국정을 농락한 믿기 힘든 막장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됐다.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만 보면 박 대통령은 무늬만 대통령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최씨는 어떻게 박 대통령을 움직였을까. 세간의 의혹에 대해박 대통령과 최씨 모두 40년 인연이 낳은 순수한 마음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박 대통령의 말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그에 대한 흔적들을 모아봤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인연’
최씨는 1956년 6월 고(故) 최태민씨의 다섯 번째 부인 임선이씨의 5녀로 태어났다. 단국대 영문과 청강생을 거쳐 동 대학원 영문과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최씨와 박 대통령을 이어준 연결고리는 최태민 목사다. 최 목사는 1970년대 중반 박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씨의 구술로 작성된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최 목사는 상심에 빠진 박 대통령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죽은 육 여사가 최 목사의 꿈에 나타난 ‘현몽’을 꾸었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최 목사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 대통령과 최 목사 모두 부인했다.
이렇게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최 목사는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 총재직을 맡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명예총재였다. 이후 박 대통령은 최 목사와 함께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 활동 등을 함께 했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각종 의혹이 나돌자 고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시켜 최 목사를 조사하게 했다. 이때 성 추문 등 최 목사의 각종 문제점이 제기됐으나 박 대통령이 최 목사를 변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새마음봉사단 활동을 하며 네 살 아래의 최씨를 만났다. 최씨는 학사 학위도 없었지만 새마음봉사단에서 대학생 총연합회장으로 활동했다.
"최순실, 권력 업고 안하무인" 쏟아지는 폭로
최씨는 오랜 시간 박 대통령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박 대통령이 은둔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에 뛰어든 것은 1997년. 그때 비서실장이 최씨의 전 남편 정윤회씨다. 최씨는 1996년 정씨와 결혼해 이듬해 딸 정유연(정유라로 개명)을 낳았고 2014년 5월 이혼했다. 정씨가 활동하는 동안 가려졌던 최씨의 존재가 이혼 후 드러나게 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번진 이번 사태에서 주목 받는 의혹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국정 농단이다. 공무원도 아니고 정치 경력도 없는 그저 평범한 일반인인 최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 각종 정부보고 문서, 국무회의자료, 심지어 국제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외교문서까지 사전에 받아보고 개입했다는 의혹이다. 이는 JTBC가 최씨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태블릿PC를 입수해 내부에 들어있는 200개에 이르는 각종 문서를 확인하며 제기됐다. (▶기사보기)
둘째는 박 대통령을 등에 업고 수상한 재단을 만들어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이다. 각종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씨는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의 돈을 받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만든 뒤 한국과 독일의 개인 회사를 통해 이 돈을 빼돌렸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기사보기) 두 재단은 표면상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나선 것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재단의 기금 모금 과정에서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적극 나섰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기사보기)
셋재는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특혜 입학 의혹이다. 이대는 학칙까지 바꿔 정씨에게 입학부터 학점 취득까지 각종 혜택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대는 정부의 각종 재정지원 사업을 여러 건 따내면서 반대급부를 받았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기사보기)
이 과정에서 최 씨가 정상적으로 학교 수업을 받지 않아 제적 위기에 놓인 딸을 비호하기 위해 학교와 교사들을 협박했다는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다. 부족한 출석일수를 지적하는 고교 시절 담당 교사와 이대 지도교수에서 폭언을 퍼붓고 해고 운운 등 모욕을 줬다는 것이다.
‘최태민-최순실 부녀 전횡’ 데자뷰
최씨의 이 같은 문제들은 박 대통령 취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뿌리가 깊다. 박 대통령은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최 목사가 육영재단 자문을 하면서 업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최씨도 10년 가까이 머물던 독일에서 돌아와 초이유치원을 차리고 육영재단 부설 아동교육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최씨는 독일에 머무는 동안 유아교육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 최씨는 육영재단 내 어린이회관의 어린이용 월간지 ‘어깨동무’ 편찬을 주관하기도 했다.
최씨 부녀가 육영재단 운영에 깊숙이 관계하면서 재단 직원들 사이에 "외부세력이 재단 운영에 개입해 재단 활동이 설립 목적에 어긋나게 사기업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박 대통령의 남동생 지만씨와 여동생 근령씨까지 나서서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 목사의 전횡을 막아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그만큼 최씨 부녀의 전횡이 심각했다는 뜻이다.
근령씨와 지만씨는 진정서를 통해 “최 목사가 박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해 교묘한 수단으로 재산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최 목사가 측근과 친인척을 기용해 공익사업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이를 통해 얻은 부로 서울 강남 및 전국에 걸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며 최 목사와 최씨 일가의 농단을 중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후 박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나며 사태는 일단락 됐지만 오히려 박 대통령과 최씨 일가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더 커졌다.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이때부터 쌓인 갖가지 의혹들은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측에서 집중 문제제기 하며 일부 내용이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 측에서 박근혜 후보 검증팀에 소속돼 핵심적 역할을 한 인사는 과거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박근혜에게 박지만은 가족이 아니라 애물단지,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며 “최태민과 최순실, 정윤회가 가족이라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기사보기)
최순실에게 박 대통령이란
최씨는 1994년 12월 여성지 ‘우먼센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말한 적이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최씨가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6년이다. 그는 박 대통령에 대해 "대학 1학년 때 흥사단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 참가해 만났다”며 “계속 지켜보았는데 참 깨끗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흐트러짐이 없고 욕심도 없다. 물러설 줄도 아는 분"이라고 말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도 최씨 일가에 대해 밝혔는데 최 목사와 관련된 각종 추문에 대해 “기상천외한 거짓말”이라고 일축했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런 사감을 국정으로까지 연결시킨 것은 누구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결국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은 더 이상 행정수반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 만큼 권위와 신뢰를 잃게 됐다. 그 결과는 단순히 박 대통령의 권위 추락으로만 그치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제 박 대통령에게 남은 과제는 참회의 심정으로 국민들이 받은 상처를 씻어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각계 원로들은 독일에 머무는 최순실씨가 빨리 귀국해 박 대통령과 함께 꾸미거나 감추는 것 없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합당한 조치를 밟는 것이 급선무라고 조언했다. (▶‘상실의 대통령’이 할 세 가지)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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