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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한 짝의 질문…묻힌 목소리를 깨우다

입력
2016.10.3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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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문학상 본심후보작에 오른 ‘L의 운동화’의 김숨 작가. 현대문학 제공
한국일보문학상 본심후보작에 오른 ‘L의 운동화’의 김숨 작가. 현대문학 제공

‘기억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적어도 김숨의 장편소설 ‘L의 운동화’를 읽는 동안은, 아니 그 소설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동안은, 나는 아마도 이 말을 굳게 믿게 될 것 같다. 이한열이 시위 진압 전경의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쓰러진 것은 1987년 6월이었다. 이 소설은 그의 오른쪽 발에서 벗겨진 운동화를 세월의 침식과 싸우며 복원작업을 했던 한 예술품 복원사의 이야기를 바로 그 복원사의 목소리로 기술한다.

복원해야 할 운동화에 담긴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복원 작업처럼 극도로 정교한 작업은 우리의 감관을 그 한계까지 예민하게 만들고, 뇌수를 전면적으로 활성화시킨다. 우리는 시간을 잊는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의 지각 속에서 시간이 멈춘다. 보들레르가 산문시 ‘취해라’에서 말하는 도취의 시간이 필경 이 작업 속에서 체험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복원 작업의 실상이기보다는 환상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의 형해만 남다시피 한 운동화가 복원되고, 소설에서 그 작업이 재현되고 독자의 정신에서 그 복원과 재현이 다시 체험되는 순간, 저 30년 전의 시간도 다시 살아난다. 광장에 사람들의 고함소리 가득하고,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매운 연기가 날아오르기보다는 쏟아져 내리고, 한 사람이 쓰러지고, 허리가 꺾인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다섯 사람 여섯 사람이 그를 부축하여 끌고 가고, 한 여학생이 운동화를 주워 병원까지 따라가는 그 시간이 저 멈춰 섰을 것 같은 시간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뒤이어 더 많은 시간이 깨어 일어난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복원사가 제 손에서 복원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소설가가 제 이야기로 어떤 진실이 어떻게 형식을 갖추는가를 물을 때, 다시 말해서 운동화 한 짝이 그 물음과 대답을 통해 시간 속에서 잃었던 생명을 다시 얻을 때, 독자들에게서는 그들이 삶을 구성하고 있거나 있었던, 그러나 벌써 망각하고 있는 사물들이 저마다 제 생명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다시 일어선다.

그들이 짧거나 길게 몸을 붙였던 셋방이나 아파트, 베란다의 방치한 죽은 고목나무의 화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L이 신었던 것과 같은 모양, 같은 질, 같은 상표를 가진 운동화들이 숨을 쉬면서 일어선다. 우리는 겹치고 이어지는 시간의 주름 속에 수많은 생명들이 빈자리를 남겨두지 않고 들어차서 저마다 발언권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당신이 불제자라면 그것을 화엄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소설가의 정신은 이 흥분과 거리가 멀다. 그는 냉정하고 침착하다. 그는 내내 객관적인 시선을 포기하지 않아서 아무 사색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야 할 것이 많은 이 소설에서 요소요소에 정보를 배치하고, 교감의 창구를 설치한다. 그리고는 무심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본다. 이것은 복원사에게 제 복원 작업을 다시 복원하는 일이고, 소설가에게는 제 서사 작업을 다시 성찰하는 일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한 마디만 더 쓰자. 이태의 소설 ‘남부군’을 보면, 춥고 배고픈 빨치산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신이었다. 나는 새 신을 살 때마다 그들의 ‘결여된 신’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아마도 나는 ‘L의 운동화’ 이후, 신발장 문을 열 때마다 복원되는 신발 한 짝을 생각할 것 같다.

황현산 문학평론가

작가 약력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나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됐다. 소설집 ‘투견’ ‘침대’ ‘간과 쓸개’ ‘국수’, 장편소설 ‘백치들’ ‘철’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물’ ‘노란 개를 버리러’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바느질하는 여자’ ‘한 명’ 등이 있다.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허균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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