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따님이 처벌을 원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나쁜 짓을 한 놈들은 처벌 받는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어머님의 현명한 결정 기다리겠습니다.’
언뜻 보면 경찰이 피해자 가족에게 수사 협조를 구하기 위해 보낸 메시지 같습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지난 9월 3일 한 어머니와 카카오톡 대화를 하며 제가 남긴 메시지입니다. 견습기자인 제가 왜 이렇게 한 어머님에 매달리는 메시지까지 보내게 됐을까요. 사연은 8월 28일 일요일 밤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날 밤, 앳된 소녀 둘과 40대로 보이는 여성 둘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강남경찰서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습니다. 이들이 경찰서 건물을 나가며 내뱉은 말이 제 귀에 들어왔습니다. “어휴 진짜 나쁜 사람들이야, 벌 받아야 해, 벌.”
바로 따라 나갔습니다. 급하게 나가는 그들을 붙잡고 무슨 일로 경찰서까지 왔는지 물었죠. 자신들을 두 모녀라고 소개한 뒤 어머니들이 꺼낸 첫 마디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딸들이 연예 기획사 실장한테 성추행을 당했다구요!”
이 여성들이 들려준 사건 전말은 이랬습니다.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한 연예 기획사에서는 지난 3월 A(16)양, B(16)양을 비롯한 5명의 10대 청소년들과 전속 계약을 했습니다. 계약서에는 5명을 6월에 무조건 데뷔시키고, 이를 위해 3개월 동안 부모 접근 없이 숙소 생활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A양 어머니 C(43)씨와 B양 어머니 D(42)씨는 이 말만 믿고 아이들을 숙소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약속한 6월이 돼도 데뷔는커녕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들은 A양과 B양을 숙소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숙소에서 나온 A양과 B양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너무 말이 없고 뭔가 숨기는 거 같았답니다. 어머니들은 두 딸을 앉혀놓고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제서야 A양과 B양은 숙소에서 실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힘겹게 털어놨습니다. 실장은 E(18)군. 연습생들에게 자신을 20살이라고 속이고 같은 숙소에서 지냈습니다. E군은 숙소에 있으면서 A양 손을 잡고 자기도 하고 틈만 나면 B양의 어깨를 계속 쓰다듬었다고 합니다. 특히 미성년자인 A양과 B양에게 술 마시러 가자며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 끌고 갔다고 합니다. A양과 B양은 무서워서 그 자리를 피했구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들은 곧장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정식으로 수사를 원하면 고소장을 접수하라는 경찰 말을 듣고 나온 어머님들은 저에게 “빠르면 다음주 화요일 늦어도 토요일에 고소장을 접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고소장 접수는 경찰 기자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소인이 고소장을 접수해 경찰이 받아들이면 ‘수사’가 시작됩니다. 수사에 들어갔다는 건 그때부터 기사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화요일과 토요일만 오매불망 기다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화요일이 됐는데도 어머니들은 연락이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어머니들은 확신이 없어져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소한다고 해서 기획사 사람들이 정말 처벌받는지 알 수 없지 않나요. 그리고 처벌받아도 벌금형 정도라던데…” 이때부터 저의 ‘당기기’가 시작됐습니다. 2013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처벌을 받았다며 설득했지요. 이 말에 어머니들은 토요일에 고소장을 접수하겠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어머니들에게 연락했습니다. 어머니들은 다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여성청소년수사팀 형사도 “왜 고소장을 접수하지 않으시냐, 그 사람들 처벌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쏟아부었습니다. ‘어머님, 고소장 접수하실 거지요? 고소장을 접수하지 않으시면 처벌은 물론이고 수사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벌을 원하시면 고소장 접수를 서둘러 주셔야 합니다.’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보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토요일에 고소장을 접수하지 않았습니다. 연락도 곧 끊겼습니다. 당연히 기사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소를 포기한 어머니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어머니들과 나눴던 카카오톡 대화를 찬찬히 살펴봤죠. 어머니들은 ‘처벌이 되더라도 보복 당할까봐 밤잠을 설친다’고 했고, ‘아이들이 2차 피해를 입을까봐 걱정된다’고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전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만 보냈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저는 왜 어머니들에게 고소를 권했을까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꼭 처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피해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물론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기사를 하나 더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들에게는 자녀의 안위가 달린 문제였습니다. 경험이 없는 개인이 경찰에 고소를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망설일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많았는데 저는 이 부분을 헤아리기는커녕 “답답하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오로지 기사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겁니다.
언론사를 준비하던 시절, 저는 늘 언론의 무리한 보도를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기사를 쓰기 위해 욕심 냈던 제 모습이 그것과 얼마나 달랐나 자신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람보다 앞에 있는 기사는 없다는 사실을 큰 실수 후에야 배웠습니다.
글ㆍ사진=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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