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을 농단한 게 최순실씨가 처음은 아니다. 비선 실세가 나라를 뒤흔든 것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혹은 ‘최순실 비선실세 논란’에서 방점이 찍히는 곳은 오로지 최순실이라는 이름 석자. 일국의 대통령이 아무런 자격도, 능력도 없는 주술적 멘토에게 국방과 외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정 사안을 일일이 보고하고 결재 받듯 해왔다는 의혹이 국가를 강타한 충격의 핵심이다.
40여 년 전 시작된 ‘순수한’ 친구관계가 이토록 참혹한 국가비상사태로 발전한 데는 어떤 심리적 기제와 동력이 작동한 걸까. 친구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적이었던 ‘프레너미(frienemy)’를 왜 대통령은 떼어내지 못했던 걸까. 이 기괴한 우정을 보며 온 국민이 심리분석의 충동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시국이다. 나의 친구들이 혹여 프레너미는 아닌지, ‘나의 최순실’이 주변에 있지는 않은지, 인간관계 전반을 재검토해 볼 때다.
누가 지배하는가: ‘프레너미’
프레너미는 친구(friend)와 적(enemy)을 합쳐 만든 모순어법의 단어다. 친구인 척하지만 실상은 해로운 적을 일컫거나, 적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건전한 경쟁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사람에 대해서뿐 아니라 조직이나 기업, 국가에 대해서도 사용되는 말이다. 이 양의적인 용어가 후자의 뜻으로 사용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관계는 전자의 프레너미다. 올 여름 부산에서는 여고동창을 18년간 노예처럼 부리며 성매매 등으로 번 8억원을 갈취했던 4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혀 충격을 준 바 있다. 전형적인 프레너미다.
프레너미의 특징으로 많은 심리학자들이 ▦급격히 친해지려 한다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하려 한다 ▦유머를 빙자해 나를 비난한다 ▦관계 초기에 쏟아 붓던 과도한 애정과 칭찬이 점점 비난과 섞이다가 모욕으로 변한다 등을 꼽는다. ▦나의 부정적 감정을 은근히 즐긴다 ▦남에 대한 비난과 가십을 입에 달고 산다 등도 프레너미의 특징인데, 이는 통제적인 사람-배우자든 친구든 직장상사든-의 특징과도 겹친다. 찰싹 달라붙어 모든 것을 좌우하려는 프레너미뿐 아니라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 폭력적인 남편,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의 지시대로 하도록 강요하는 부모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이자 심리학자인 안드레아 보니어 박사는 지배하려는 욕구를 지닌 사람들의 특징으로 20가지를 열거하는데, 최순실 사태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다. 첫 번째 특징이 ‘나를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고립시킨다’. 자신 외의 다른 친구들, 심지어 가족과의 만남이나 통화도 싫은 기색을 비치며 막는다. 이는 지배자가 되기 위한 1단계로, 조력자 네트워크를 파괴해 자신과 맞서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막대한 애정과 헌신을 쏟아 부으며 맹목적인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든 후 빈도와 강도를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당하는 쪽은 이를 멘토의 건설적 조언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우정과 친밀성의 근거로 신상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면서 자신의 제안이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 사랑을 주지 않을 것처럼 불안하게 만든다. 죄책감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어 박사는 “이들은 자신이 쏟아 부은 맹목적 사랑과 헌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면서 ‘너는 나에게 신세 지고 있다’는 것을 늘 환기시킨다”며 “감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이들에게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라고 설명한다.
프레너미는 항상 친구를 미묘하게 비하한다. 이는 ‘내가 너 같은 사람과 친구가 돼 준 걸 감사히 여겨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다. 이 그릇된 감사의 마음은 프레너미를 위해 보다 열심히 일하고 헌신해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구를 만들어내는 동역학이 된다. 최씨가 “대통령을 일일이 코치해야 해 피곤하다”고 말한 데서 이 기묘한 프레너미의 심리학을 엿볼 수 있다.
왜 지배당하는가: 의존성 인격장애
누구나 인생에서 프레너미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관계에서 자력으로든 조력을 받아서든 벗어난다. 무려 40여 년 간 프레너미와 함께해왔다는 건 프레너미의 강력한 지배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태다. 프레너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심리조작의 비밀’(어크로스 발행)을 쓴 일본 심리학자 오카다 다카시는 의존성 인격장애를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독재자, 파괴적인 컬트 구루, 폭력적인 남편, 흉포한 상사,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세뇌된 듯 심리 조작을 당하는 사람들은 의존성이 최대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2013년 말 국내에 첫 번역됐다가 이번 주(기가 막힌 타이밍!) 재출간된 이 책의 80쪽을 보자. 다른 나라 독자들에게는 범상하지만 한국 독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는 구절들이 줄줄이 나온다.
“구태여 희생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향도 볼 수 있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은 살아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단 의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강한 의지를 지닌 존재에게 기대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지 못하며 의존하는 사람에게 맡겨버린다. 곤란한 일이 일어나면 바로 그 사람에게 달려가 상담을 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의사결정을 타인에게 시작하면 사소한 일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되고,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박 대통령이 고 최태민 목사에 이어 왜 그 딸인 최순실씨에게 의존했는지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다. “의존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강한 의사를 지닌 존재에게 지배되기 쉽다. 심지어 스스로 나서서 자신을 강력하게 지배해주는 존재를 찾으려고 한다.” 본인이 자신을 지배해주는 사람을 찾아 나서므로 대물림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 된다. 오카다는 의존성 인격장애가 되기 쉬운 배경으로 “난폭하고 권위적인 부모나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는 가정에서 자란 경우”와 “자식을 위한 행동일지라도 부모가 지나치게 보호하고 간섭하고 주체성을 침해”할 경우를 꼽았다.
그렇다고 특정 인간의 유형만 심리 조작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도 영향을 미친다. 그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스트레스와 고립감”에 빠진 상황이다. 자존감과 자아가 강한 사람도 “병이나 이별, 경제적 곤경 등으로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는 쉽게 희생양이 된다고 는 지적한다.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고립 상태도 심리 조작을 당하기 딱 좋은 상태다. “과거 신좌익 정치 집단이나 컬트 종교 집단이 주로 지방에서 도시로 올라와서 혼자 살기 시작한 고독한 청년들을 노렸”던 것은 이 때문이다.
충고 대신 역할모델 돼야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고립감과 의존성이 왜 하필 최씨 일가에게만 유효한 심리 조작의 발아조건이 된 걸까. 충직한 조언과 진실한 충고에는 ‘광광’ 책상을 치며 역정을 냈다는 보도가 이어지며 ‘불통’이 대통령의 대표적 이미지가 됐는데, 왜 최순실씨와만 ‘진실한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이가 됐을까.
세상에서 가장 값이 싼 것이 충고다. 수요는 없는데 공급은 넘쳐나기 때문이다. 충고 앞에 자주 붙는 수식 중 하나가 ‘원치 않는’인 이유이기도 하다. 고로 충고는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실 충고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는 사람은 위인전에서 말고는 본 일이 없지 않은가. 충고를 들으면 누구나 방어적인 저항태세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인간 고유의 자유의지가 침해 받는 것이자, 충고자의 지적ㆍ도덕적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운전시 잔소리 하는 남편부터 크게는 국정 동반자의 직언에 이르기까지 충고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 차이가 가장 큰 언어영역이다. 바다로 수영하러 들어가는 내게 “상어가 발견됐대요”라고 정보를 주는 것과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충고를 하는 것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받는 쪽은 전자를 훨씬 선호하고 고마워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우위를 다투는 입장보다는 신의 계시가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주술은 받아들여도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심리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충고는 지시적 언어의 형식이 아니라 역할 모델의 형식으로 이뤄져야 실행 효과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심리학자인 토머스 플랜트 박사는 “많은 연구가 원치 않는 충고와 지시에는 사람들이 저항하지만,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따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특히 그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인식할 때 ‘모델링’이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주술과 조언, 프레너미와 멘토를 구분할 수 있는 핵심키트가 바로 ‘모델링’, 본받기인 것이다.
이 어수선한 시국에 굳이 교훈을 하나 추출하고자 한다면 이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에 변화를 촉발하고 싶다면, 그 자신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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