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가족여행을 갈 거란다. 1년 만에 가는 여행이라 마음은 무지개를 걷고 있지만, 가방 쌀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달에 두세 번 여행을 떠나는 신세라 가방 싸는 일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예전에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1년간 집을 비우기로 마음먹은 세계 일주를 준비할 때는 더 했다.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어찌나 막막하던지.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는 만고의 진리를 벽 앞에 턱 하니 붙여놓고 준비물은 차곡차곡 쌓았다. 고민은 신발부터 시작됐다. 출발할 때 신을 운동화 외에, 샌들이 필요했다. 숙소에서는 편하게 신을 슬리퍼도 챙겨야 했다. 산에 오르려면 튼튼한 등산화도 있어야 했다. 45ℓ 용량의 배낭에 수십 가지 물건을 넣고 빼기를 수십 번. 올림픽 대표 선발전이 따로 없었다. 토너먼트를 통해, 최종 후보들이 결정됐다. 그렇게 최소한으로 꾸렸지만, 짐은 15㎏에 달했다.
결국 첫 여행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숙소에 배낭에 담긴 물건을 탈탈 털어놓고, 꼭 쓸 것들만 골라내는 일이었다. 여행하다 만나는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은 한 개만 남겨두고, 숙소에 있는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간직해야 할 것들은 지구 반대편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미 충분히 다이어트가 되어 있는 상태라, 그리 많이 줄진 않았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360일 중 숙소를 옮기지 않은 며칠을 빼놓고는 매일 짐을 싸고 푸는 일을 반복했다. 그럴수록 짐은 점점 작아졌다. 가지고 있는 옷이 서너 가지니, 무엇을 입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가방이 투명가방인 것처럼,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했다.
벼룩 시장이 생기면 옷가지를 들고 달려나갔다.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로 꼽히는 짐바브웨의 빅토리아폭포. 빅토리아폭포 앞 시장에서는 현지인과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다. 낡은 청바지를 하나 들고 갔다. 너무 낡아 아무도 관심 없을 것 같았지만, 경험이라 생각하고 나섰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인기폭발이었다. 문득 내 잣대로만 가치를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중요한 것이 다르고 가치가 다른 것을.
내 배낭에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자그마한 커피포트였다. 무게는 500g도 안 되지만 부피가 있어, 조금은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따뜻한 차 한 잔 마셔야만 하는 나에게, 커피포트는 마지막까지 함께 해야 하는 친구였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360일간의 삶이 45ℓ짜리 배낭 속 물건으로 가능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집에 들어섰을 때, 1년간 침묵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물건들 없이도 1년이 안녕하게 흐르다니. 15㎏ 정도의 짐이면, 360일이 아니라 평생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 살 때는 쇼핑을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가득했는데, 길 위에서는 배낭 하나로 충분했다. 그 차이는 ‘버리기’였다. 여행할 때 원칙이 있었다. 꼭 입고 싶은 옷이 생기면, 무조건 가지고 있는 옷을 하나 버렸다. 책을 한 권 사게 되면, 이미 읽은 책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다. 그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만 남겨두었다. 아무리 욕심이 나도 총합 15㎏이 넘으면 아웃이었다.
버릴수록 좋은 것은 짐뿐만이 아니다. 욕심도 그렇다. 물론 적당한 욕심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조금만 더’를 외친다. 조금 더 큰 회사에 취직했으면 좋겠고 아파트 평수가 몇 평만 더 넓었으면 좋겠고 최신형 자동차로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나를 얻으면 두 개의 욕심이 생긴다. 그리고 두 배로 늘어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더 바쁘게 뛰고 달린다.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아무리 채워도 끝없는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더’를 외치고 싶을 때마다, 배낭을 쳐다본다. 끊임없이 덜어내야 했던 길 위의 시간을 생각한다. 살아가는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질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버리는 것만이 답이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말이다.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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