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의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을 어떤 장르의 드라마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모처럼 안방극장에 등장한 감성 멜로인지, 아니면 김하늘과 이상윤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인지, 혹은 아슬아슬한 불륜의 감정을 그린 스릴러인지.
나에게는 ‘공항 가는 길’이 최루성 드라마였다. 9회였나, 항공기 승무원인 최수아(김하늘)가 출근길 공항버스에서 그냥 내려버린다. 친한 언니에게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 달라고 말해 놓는 것도 잊어버렸고, 생각해 보니 김밥은 만들다가 말고 집에서 나왔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서 힘들어 하는 딸 이야기에 ‘우리 딸은 그 정도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아이다’라고 윽박지르는 남편의 문자를 받아서다.
그때 김하늘의 눈에 들어온 건, 저 멀리 어떤 아파트 베란다에서 햇볕 속에 평화롭게 이불을 널어 말리는 어떤 젊은 주부의 모습. 순간 김하늘의 독백이 나온다. ‘나는 왜 이러고 사나. 왜 이렇게 하루하루 미친년처럼 사나.’ 그리고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오늘 비행은 못 가겠습니다. (잠시 침묵) 네, 사표는 정식으로 제출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순간, ‘왜 이렇게 하루하루 미친년처럼 사나’라는 대사가 갑자기 너무 와 닿아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아서 엉엉 울어버렸다. 이 드라마가 최루성 다큐멘터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너무나 예쁘게 포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설정이나 줄거리는 다소 비현실적이다. 애 엄마 최수아(김하늘)는 너무나 하늘하늘 청순하고, 서도우(이상윤)는 비정상적으로 다정다감(외모도 비현실적인 훈남이다)하다. 그리고 최수아와 서도우의 감정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인지 최수아의 배우자인 박진석(신성록)과 서도우의 아내 김혜원(장희진)은 지나치게 비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몰입이 되는 건, 바로 최수아와 서도우의 어떤 상황과 대사들이 너무나 절절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최수아는 육아와 일을 함께 하느라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탈진 상태다. 그동안 아이를 봐 주었던 친정 엄마는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자식들을 도울 생각은 없다. 남편은 공감 능력이 거의 없고,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어쩌면 최수아에게 ‘간절히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은 서도우 라기보다도 ‘일’이었던 것 같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무던하고 단순해서 승무원이 천직”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만 했던 것이 일이었다.
최수아는 승무원, 남편 박진석은 기장인데 둘 중 ‘하늘을 날기를 포기해야 했던 사람’이 엄마라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가슴 쓰린 은유로 보였다. 최수아가 자신에게 숨통을 트여주는 상대인 서도우를 휴대폰에 ‘공항’이라고 저장해 놓은 것도 이런 뜻 아니겠는가.
서도우는 14회에서 이혼을 결정하고는 이렇게 말 한다. “혜원이와 헤어지면 뭔가 해결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는 말이다.
헤어지고 싶었던 사람과 갈라서는 것, 나름 힘들고 간절했던 일이었는데 이뤄지고 나니 마냥 좋고 신나는 건 아니라는 하소연이다.
돌아보니 그렇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대학에 가면’ ‘취직을 하면’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으면’이라고 막연하게 목표를 만들었지만, 그걸 하나씩 이뤘을 때마다 그저 단순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숙제, 더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사는 게 그런 것 같다. 주변의 누군가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어떤 큰 변화가 갑자기 생기는 시기. 그리고 그 변화, 혹은 목표달성을 겪으면서 ‘어, 내가 예상했던 느낌은 이게 아닌데’ 라며 혼란스러워 하는 그런 시기 말이다.
그동안 불륜을 다룬 드라마는 수 없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2016년의 ‘공항 가는 길’은 좀 특별하다. 최수아와 서도우의 로맨스는 그 어떤 드라마 보다도 예쁜 그림으로 그려진다. 감정선은 스무 살 첫사랑을 그린 드라마처럼 애틋하다.
하지만 진짜 감정선은 따로 있다. 현실에서 최수아-서도우와 비슷한 나이의 시청자들이라면 더욱 공감할 그 어떤 부분이다. 나이는 이렇게 먹어가는데 왜 자꾸 사춘기가 계속되는 것처럼 사는 게 혼란스럽지, 하는 바로 그런 감정 말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있다. 살수록 인생이 내로남불이다. 결혼 생활도, 육아도, 회사 생활도, 나는 너무나 버겁고 힘들어서 미치겠는데,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미친년 같은데, 막상 남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야, 다 힘들어. 다 똑같아”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해버리고 만다.
앞서 언급했던 최수아의 퇴사 장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시 최수아는 이불 널던 전업주부를 보며 ‘평화로워 보인다’며 가슴 저미게 부러워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아주머니는 이불을 널다가 본 저 아래 대로변의 빨간 유니폼 워킹맘 승무원을 보고 ‘저 사람은 자기 일도 하면서 애도 키우는구나. (게다가 날씬하기까지…)’ 하면서 울고 싶도록 부러웠을지 모른다. 그것 봐, 다들 내가 제일 불쌍하고 힘들다니까.
마더티렉스 (프리랜서 작가)
[TV 좀 봅시다 더보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