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사이트를 뒤덮는 막장 드라마 관련 뉴스들을 보며 거친 말을 내뱉곤 했다. 친딸을 자신의 양아들과 결혼시켜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조연부터 주연까지 심지어 출연하는 견공까지 급작스런 죽음으로 내몰고, 귀신에 빙의돼 눈에서 레이저빔을 쏘고. 현실성이라고는 요즘 말로 ‘1’만큼도 없는 상황을 설정하는 작가나, 그런 드라마의 시청률을 끌어올려주는 열혈 시청자들의 정신세계를 납득할 수 없었다.
이제 막장 드라마 작가들에게, 또 시청자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보다 훨씬 막강한 막장 요소를 갖춘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온 국민을 경악케 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주부들이 욕하면서도 본다는 막장 드라마가 갖춰야 할 흥행 공식들을 모조리 갖추고 있다.
첫째, 지독한 악역. 검찰이 지금까지 최순실씨에게 적용한 혐의는 ‘고작’ 직권남용과 사기미수이지만, 양파 껍질 벗기듯 드러난 의혹은 십 수가지가 넘는다. 국가기밀 유출, 대기업 강제모금, 예산 편취, 부정 입학까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겁다. 차은택, 안종범, 문고리 3인방 등 주연 같은 악역 조연들도 즐비하다.
둘째, 반전에 반전. 대통령 연설문이 뭉텅이로 담긴 태블릿PC가 박근혜 대통령의 물타기 개헌 카드를 몇 시간만에 뒤엎어버린 지난달 24일 이후 하루하루 숨막히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대통령 공식 사과, 우병우ㆍ안종범 전 수석 및 문고리 3인방 사표 수리, 최순실씨 검찰 출두와 구속, 기습개각, 대통령의 2차 사과, 촛불시위, 그리고 대통령의 총리 지명 철회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셋째, 황당한 설정. 드라마 속 설정이었다면 “저게 말이 돼?”라면서도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들 투성이다. ‘혼’ ‘우주의 기운’ 등 대통령의 연설문 속 단어들이 아버지 최태민씨의 ‘영세교’에 영향을 받은 최씨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거나, 호스트바 출신이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은 ‘비선 실세’와 엮여 국정에 개입했다거나, 민간인이 청와대 비서관, 심지어 수석들까지 수족부리듯 했다거나.
‘막장의 대모’라는 천하의 임성한 작가도 이 정도까지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긴 지금까지 정치가 막장이 아닌 적은 별로 없긴 했다. 역대 정부마다 소름 돋는 게이트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 사태는 역대 막장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대통령 본인이 악역의 중심이라는 점, 그리고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혹은 애써 모른 척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두 번째 대국민 사과에서조차도 ‘오랜 인연’을 지나치게 믿은 것에 대해서만 잘못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사상 최저라는 5%까지 떨어졌다. 이 5%는 아마도 이 희대의 막장 드라마가 지금 방영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상황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지지를 보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뒤집어 말하면, 지금 이 막장극의 시청률은 95%쯤 된다는 얘기일 거다.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공식은 모든 등장인물이 갑자기 용서받고 화해하는 무리수 해피엔딩이다. 지난 주말 도심을 가득 메운 20만개 촛불은 이 공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준엄한 민심이다.
이젠 펜을 국민이 잡아야 한다. 대권에 대한 전략적 계산에 몰두하는 야권에만 맡겨서도 안 된다. 박 대통령이 국회가 총리를 추천하면 내각 통할권을 주겠다고 한 건 그 첫 작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감시 또한 국민의 몫이다. 만약 이것이 국면수습용에 불과하다면, 권한을 내려놓을 생각이 끝끝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땐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옳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의 트라우마가 아무리 깊다 한들, 이대로 1년4개월을 더 가는 것보다는 그 혼란을 감내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게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고 역사이기에 그렇다.
이영태 경제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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