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사정 때문에…
근무ㆍ육아ㆍ간병 등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못가는 시민들
1인 촛불 키며 열기에 동참
SNS는 또 다른 광장
‘집서 함께하는 등불집회 시위’
미국ㆍ스페인 등 외국서도 동참
육아 카페서는 참여 방법 공유
지난 22일 오후 6시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5번 출구 앞. 퇴근길을 재촉하는 인파 사이로 정장에 두꺼운 점퍼를 입은 중년 남성 30여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잠시 후 각자 챙겨 온 초를 꺼내 불을 켜고 ‘박근혜 정권 퇴진’을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매서운 칼바람에 촛불은 꺼지기 일쑤였지만 직장인들은 서로 도와가며 손방패를 만들어 촛불을 지켰다. 17년 간 증권사에서 근무한 박정현(44)씨는 “개인 사정으로 촛불집회에 참석하지 못해 다른 시민들께 죄송하다”며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에 무임승차하고 싶지 않아 잠시 시간을 냈다”고 말했다.
근무와 개인 일정, 육아 등 여러 사정으로 거리집회에 나설 수 없는 시민들이 ‘나홀로 촛불집회’를 열며 정권 퇴진을 바라는 열기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정권에 저항하면서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서 양식 음식점을 운영하는 남서윤(28)씨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토요일 오후 7시가 되면 3분 동안 소등을 한다. 남씨는 25일 “박 대통령에게 항의하고 싶어 전등끄기 아이디어를 냈다”며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이제는 손님들이 전등 촛불을 가져와 켤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전했다. 서울 강남의 한 편의점에서 주말 근무를 하는 박훈(31)씨도 “비록 몸은 광화문에 갈 수 없으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실시간 중계를 보면서 응원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 중립 의무를 이유로 집회 참석이 부담스러운 공무원들도 촛불정신을 실천 중이다. 수도권의 한 부대에서 근무하는 대위 A(27)씨는 촛불집회가 시작된 뒤 사무실에 향초를 가져다 놨다. 그는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인 신분이지만 상관 지시에 무턱대고 순종하면 이번 사태는 언제든 재연될 것”이라며 “향초를 태우면서 불의에 순응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육아와 간병 등으로 짬을 내기 어려운 이들 역시 자신 만의 촛불로 세상을 밝히고 있다. 올해 8월 첫 아이를 낳은 박연희(28)씨는 “엄마가 되고 나니 자녀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줘야 할지 책임감이 생긴다”며 “아직은 건강 때문에 집회에 참석할 수 없지만 SNS 프로필 사진을 촛불로 바꾸고 저항 정신을 공유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투병 중인 80대 노모를 보살피는 박성순(58)씨도 “자식들이 보내온 인증 사진과 광화문에서 사 온 전등 촛불을 병실에 걸어 놓고 박 대통령 퇴진을 염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온라인은 다양한 사연이 담긴 1인 촛불이 모이는 또 다른 광장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집에서 함께하는 등불집회 시위’는 매주 토요일 오후 9시부터 30분 동안 각 가정에서 노란색 등만 켜놓는 모임이다. 벌써 3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취지에 공감했다. 23일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촛불 사진을 올린 전은지(27)씨는 “미국 언론에까지 박 대통령이 등장한 걸 보고 너무 부끄러워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육아 관련 온라인 카페들에도 매주 토요일을 전후로 회원들이 올린 글이 수십건씩 올라 온다. 엄마들은 임신 기간에 따른 집회 참석 가능 여부를 묻고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참여 방법도 공유한다.
집회에 나갈 수 없는 시민들을 위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시민불복종 운동도 구체화하고 있다. 변호사 류재언(33)씨는 25일 서울 마포구 한 공연장에서 시민 저항권을 다룬 미국 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고전 ‘시민의 불복종’ 강독회를 진행했다. 류씨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납세 및 등교거부, 국민총파업 등 생활 투쟁을 주제별로 토론하고 실천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분석했던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로 다른 배경과 직업, 사회적 지위를 가진 촛불 시민들의 목소리는 광화문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며 “정권 퇴진을 목표로 뭉친 이성과 감정의 공동체인만큼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연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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