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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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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사망

입력
2016.11.2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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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연설 도중 쿠바 국기를 흔드는 피델 카스트로.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4년 연설 도중 쿠바 국기를 흔드는 피델 카스트로.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쿠바의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25일(현지시간) 타계했다. 90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카스트로가 25일 오후 22시29분 숨을 거뒀다고 국영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라울 카스트로 의장은 26일 고인의 유지대로 그를 화장한다고 밝혔다.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혁명으로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트리고 민족주의 공산정권을 수립한, 남미 공산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외부로는 피그스 만 침공 등 미국의 압력에 저항했고 내치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노선을 택해, 공산당 일당 독재와 기업 국유화 정책 등을 펼쳤다.

1960년대 ‘혁명 동지’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60년대 ‘혁명 동지’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26년 쿠바 올긴 주 비란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카스트로는 아바나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좌파 학생운동에 몸을 담았다. 1953년 7월 26일 산티아고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처음 바티스타 정권을 뒤엎기 위해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수감된 카스트로는 재판정에서 “나를 비난해도 상관없다.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라는 연설을 남기며 오히려 이름을 드높였다. 1955년 사면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 훗날 혁명 아이콘이 되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를 비롯한 새로운 동지들을 만났다.

이듬해 82명으로 구성된 카스트로의 혁명대는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침입했다. 대원이 19명밖에 살아남지 않았지만, 그의 등장과 함께 반(反)바티스타 성향 민병들이 들고 일어나 쿠바를 혼란에 빠트렸다. 3년 간의 내전을 거쳐 혁명군은 1959년 아바나에 입성, 바티스타를 완전히 축출하고 카스트로는 그 해 2월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카스트로는 교육 개혁과 의료보험 국영화 등의 정책을 펼쳤으며, 정부 수립 직후 미국을 방문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도모했으나 냉전이 심화되는 국제적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연방과 가까워졌다. 미국과의 관계는 1961년 3월 미국이 쿠바 내 반란군을 지원하는 ‘피그스 만 침공 사건’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무너진다. 쿠바는 사회주의 모델을 채용했고 1962년 소련의 핵탄두를 쿠바에 배치할 것을 요청,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를 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다.

1979년 유엔 총회에서 비동맹국가의 대표로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세계적인 빈부격차 문제를 지적한 이 연설은 각국 지도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유엔 총회에서 비동맹국가의 대표로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세계적인 빈부격차 문제를 지적한 이 연설은 각국 지도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쿠바 혁명이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뒤엎었다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이후 카스트로의 독재 통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내치에서는 의료보험과 의무교육 제도가 호평을 받고 있으며 외교로는 소련이 무너지기 이전인 1970년대부터 비동맹운동(NAM)에 적극 참여하는 등 가난한 제3세계 국가를 지원했다.

그러나 카스트로 치하의 쿠바 공산당은 일당 독재 체제를 강화, 반체제 인사를 철저히 탄압했고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 내각책임제 하의 총리를, 1976년부터 2008년까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반세기 동안 최고 통치권을 놓지 않았다. 정적이 될 수 있는 인물은 ‘혁명영웅’이라도 숙청됐다.

안정적이라고 평가된 경제도 소련과 구(舊) 공산권의 붕괴 이후 위기에 빠졌다. 이른바 ‘특별기간’이라 불리는 이 시기를 카스트로는 집단농장을 협동조합 체제로 개편해내는 등 합리적인 개혁으로 극복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미국의 경제제재 등으로 쿠바의 경제발전에 일정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카스트로 은퇴 후 후계자가 된 동생 라울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관광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가운데)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동생이자 현 국가평의회 의장인 라울 카스트로(오른쪽)의 손을 잡은 채 연설을 준비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피델 카스트로(가운데)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동생이자 현 국가평의회 의장인 라울 카스트로(오른쪽)의 손을 잡은 채 연설을 준비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건강상의 이유로 2008년 은퇴한 이후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카스트로는 올해 4월 19일 공식석상에 나타나 죽음을 예견한 듯 “곧 90세가 된다. 아마 이번이 내가 이 홀에서 말하는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쿠바 공산주의 사상은 열정과 품위를 가지고 일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적, 문화적 재화를 생산할 수 있다는 증거로 지구 상에 오래 남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반미 제3세계 지도자’는 쓰러졌지만, 라파엘 코레아(에콰도르)ㆍ에보 모랄레스(볼리비아)ㆍ니콜라스 마두로(베네수엘라) 등 반미 민족주의 성향을 띠는 남미 ‘핑크 타이드(온건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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