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경주(레이싱)라고 하면 대개 ‘포뮬러1(F1)’ ‘르망24’ ‘월드랠리챔피언십(WRC)’ 같은 거창한 대회를 떠 올린다. 모두 가공할 성능을 뽐내거나 어마어마한 가격의 차들이 겨루는 레이싱이다. 그러나 성능 좋고 비싼 차들만 레이싱을 하라는 법은 없다. 지난해 시작된 ‘언더100레이스’는 중고차 가격이 100만원이 안 되는 낡은 차로도 얼마든지 ‘운전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자동차 경주의 고정관념에 도전
지난 20일 오전 8시 강원 인제군의 자동차 경주장 ‘인제스피디움’에 협찬기업 스티커를 현란하게 붙인 차들이 집결했다. 외모로는 경주용 차들이 분명했지만 TV를 통해 보던 스포츠카나 고성능차들은 아니었다. 단종된 지 한참 지난 현대자동차 ‘티뷰론’과 ‘투스카니’가 많았고, 기아자동차 ‘스펙트라’, 대우자동차 ‘브로엄’ 등도 보였다.
가까이 다가서니 이 차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앞 범퍼를 투명 테이프로 둘둘 감아서 고정한 차 옆에는 심지어 범퍼에 청테이프를 잔뜩 붙인 차도 있었다. 바퀴 윗부분 차체가 우그러진 차, 방향지시등(깜빡이)이 떨어져 나간 차, 도색이 벗겨진 차들도 흔했다. 차 바닥 쪽이나 바퀴 둘레의 차체에선 누런 녹이 없는 차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 47대의 차들 중 가장 연식이 오래된 차는 현대차의 91년식 ‘엑셀밴’이었다. 가장 최신 차라고 해봐야 2006년식 현대차 ‘아반떼’(HD)와 기아차 ‘세라토’ 정도였다.
‘2016 인제군수배 모터페스티벌’의 일부로 진행된 이날 언더100레이스는 차량을 세 등급으로 구분했다. 중고차 시세나 보험가액이 100만원 이하인 차는 ‘언더100 클래스’, 현대차의 1.8ㆍ2.0ℓ급 베타 엔진이 들어간 차들은 ‘베타 클래스’, 제작된 지 10년이 넘은 배기량 3.5ℓ 이하 국산차는 ‘텐이어 클래스’에서 달렸다.
하나 같이 구형 모델들이지만 서킷에서는 우렁찬 포효를 내뿜으며 질주했다. 평균 속도는 시속 120㎞ 안팎이었지만 직선 주로에서는 170㎞까지 넘나들었다. 최신 차들이 겨루는 국내 다른 경주의 시속 150㎞대 평균 속도에는 못 미치지만 차량들의 연식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레이싱이었다.
안전에 대한 걱정은 기우였다. 규정 상 헬멧, 장갑, 레이싱용 안전띠, 소화기 등 안전장비를 갖추지 못하면 참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서킷에서 발급한 레이싱 자격증도 있어야 한다. 경주 운영을 총괄하는 윤종덕 모터타임 레이싱팀 단장은 “해외에는 낡은 차들이 달리는 대회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언더100레이스가 최초이자 유일하다”며 “레이싱의 진입 문턱을 낮췄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낡은 차로 스피드를 즐기는 이유
언더100레이스는 10년 전 아마추어 레이서로 활동한 조경준(37ㆍ회사원)씨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경제적 부담 없이 레이싱을 즐길 방법을 찾던 조씨는 지인들과 100만원짜리 중고차를 사서 언더100레이스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고, 모터타임 레이싱팀과 함께 그럴듯한 레이싱 대회로 발전시켰다. 첫해인 지난해 2전, 올해는 총 4전을 치르는 동안 80여 명이 참가해 서킷 주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대부분 결혼을 했고 자녀를 키우는 ‘아재’들이다. 이들은 “비슷한 사람들과 경쟁하며 달리는 게 즐겁다”고 입을 모았다.
250만원에 구입한 현대차의 2002년식 중고 ‘아반떼XD’로 이날 베타 클래스에 출전한 박재성(35ㆍ교직원)씨는 “일반도로에서 느낄 수 없는 속도감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왔다”며 “술 담배를 안 하는데다 오늘을 위해 집안일을 열심히 해서 아내도 이해해준다”고 말했다.
네트워크 보안 기술자 임재훈(38)씨도 “평소에 잘하고 어제는 처갓집에서 김장까지 담그고 왔다”며 웃었다. 임씨 차는 98년식 기아차 ‘크레도스’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청개구리색이었다. 150만원에 샀지만 현재 보험가액은 0원이다. 그는 “서스펜션만 인터넷 중고장터에서 10만원에 구입해 교체했고, 나머지 부품들은 전부 재활용품”이라며 “레이싱은 내 삶의 활력소”라고 말했다. 그는 가끔 출퇴근 때 이 차를 쓰고, 주중엔 가족들을 태우기도 한다.
파란색 레이싱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 입고 출전한 최우제(42ㆍ치과의사)씨는 “순위보다는 즐겁게 달리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차는 100만원에 구입한 99년식 브로엄이다. 지난해 레이싱 자격증을 딴 최씨는 “레이싱은 차를 통해 내가 가진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는 게 매력”이라며 “좋은 차로 달리면 당연히 좋겠지만 유지비가 많이 들고, 파손 시 수리비가 너무 비싸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언더100레이스를 창안한 조씨는 공감대가 확산되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는 “차 과시가 아닌 진짜 레이싱을 즐기고 싶은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며 “겉으로는 과격해 보여도 레이싱은 섬세한 운전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하고, 꾸준한 연습으로 기록을 경신해 가는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인제=글ㆍ사진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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