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을 비롯한 국정농단 혐의자들이 잇따라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의혹의 핵심 인물이 포토라인 앞에 실체를 드러낼 때마다 국민적 분노는 들끓었다. 이들을 향해 빗발치는 플래시 세례와 질문 공세, 시민단체의 피켓 시위가 얽히면서 포토라인은 무너졌고 국민은 탄식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국기 문란 사태를 초래한 당사자들은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며 빠져나갈 궁리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이 마치 포토라인 통과용 암호인 양 되풀이 한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말조차 믿기 어렵다. 과연 곧 출범할 특별검사 사무실 앞 포토라인에선 이들의 진실된 참회와 고백을 들을 수 있을까.
“죽을 죄를…” “죄송합니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
포토라인 통과 암호인 양 되풀이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동안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정ㆍ관ㆍ재계 인사가 포토라인에 섰다. 유ㆍ무죄를 따지기 앞서 국민 신뢰를 저버린 의혹만으로, 그 자리에 선 사실만으로도 참담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포토라인은 결백을 주장할 기회인 동시에 혐의를 깨끗이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의 자리였다. 누군가엔 피하고 싶은 치욕스러운 이벤트였고 당당하게 내뱉은 주장이 훗날 거짓으로 판명된 경우도 허다했다. 포토라인 위에 흩뿌려진 그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유형별로 모았다.
#1. 포토라인에선 ‘죄송’ 조사실선 ‘부인’
연달아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정신이 혼미해져 고개를 떨궜다. 쏟아지는 질문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만 무한 반복했다. 전쟁터 같은 포토라인을 지나 검찰 조사실에 들어서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포토라인이 국민이 보는 앞에서 치른 낯뜨거운 통과의례라면 검찰 조사는 치열한 법리 공방이 예고된 전쟁터다. 무엇이 그리 죄송했는지 헤아려 볼 겨를도 없이 그들은 즉각 혐의를 부인했다. 앵무새처럼 내뱉은 “죄송하다” 란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최순실(2016.10.31)
포토라인을 지나며 흐느끼던 최씨는 검찰 조사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 스스로 저질렀다고 말한 ‘죽을 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저 하나로 인해서 너무나 큰 물의를 일으키고…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차은택 전 문화창조융합본부장(2016.11.9 )
포토라인에 서서 눈물로 사죄했으나 광고사 강탈 공모 등의 범죄사실 부인 중.
“검찰에서 물어보시는 대로 성실하게 조사를 받겠습니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2016.11.6)
질문하는 기자를 쏘아보며 조사실로 향한 우 전 수석은 조사실에서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면서 ‘황제소환’ 논란. 검찰 내 ‘우병우 라인’이 건재한 상황에서 ‘성실한 조사’는 애초부터 거짓말 아니었을까.
“응분의 처분을 달게 받고 평생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스폰서 의혹’ 김형준 전 부장검사(2016.9.24)
밤샘 조사를 받고 귀가하며 용서를 구한 김 전 부장검사는 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공소사실 전체를 부인한다”고 주장.
“(유해성을) 전혀 몰랐습니다. 피해자와 유가족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신현우 전 옥시 대표(2016.4.26)
사과 직후 포토라인을 지나 변호사에게 “내 연기 어땠어요?”라고 물었다는 목격담이 전해져 거짓 사과 논란. 뒤늦게 ‘연기’가 아니라 ‘얘기’라고 해명.
“(세월호) 희생자 여러분과 가족 분들께 정말로 죄송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김한식 청해진해운(세월호 선사) 대표(2014.5.8)
합동수사본부로 압송되며 고개를 숙인 김 대표는 다음 날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화물 과적, 고박 불량 등 혐의를 전면 부인. 모르쇠로 일관하는 김 대표를 향해 판사가 호통을 침.
#2. 강한 부정은 긍정? 무조건 결백 주장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포토라인에 선 대부분의 인사는 혐의를 인정하기보다 결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치 부끄럼 없이 당당했던 그들의 주장이 훗날 법원의 판결이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거짓말로 드러나는 경우는 흔했다.
“전혀 인정 안 합니다. 돈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2013.7.5)
건설업자로부터 청탁성 금품을 받은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되면서 거짓말로 드러남.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상득 전 의원(2012.7.3)
저축은행 비리 연루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며 던진 일성.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동원한 ‘유체이탈 화법’은 2014년 6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며 거짓말로 판명.
“네”
가수 싸이(2007.6.4)
병역특례 비리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출두하며 ‘제대로 근무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당당하게 답했으나 수사결과 부실 근무 사실 드러남. 군대 재복무.
#3. “나는 권력의 희생양” 피해자 코스프레
제기된 혐의나 의혹에 대해선 시인도 부인도 없다. 다만 자신이 표적 수사의 희생양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만 가득하다. 정치적 탄압을 강조하며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만 비리는 비리일 뿐, 결국 유죄 선고를 피할 순 없었다. 포토라인 앞 그들의 한숨에 과연 진실이 숨겨져 있었을까. 그것을 밝혀내는 일은 역사의 몫으로 남았다.
"패장이 겪는 고초 아니겠나. 이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2004.1.26)
거액의 대선자금을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검찰에 출두하며 자신이 정치 보복의 희생양임을 주장. 그러나 법원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추징금 12억 원 선고.
“오늘 저의 무죄를 입증하러 온 게 아니라 진보세력의 탄압에 대해 진실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나왔습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2012.9.28)
국고 사기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며 정치 탄압 중단을 촉구. 내란선동죄 등으로 9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가운데 지난 1월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형량 1년 추가.
“충신을 역적으로 모함하는 이 땅의 불의를 응징해 주십시오”
허준영 전 코레일 사장(2016.3.31)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비리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며 자신을 억울한 충신으로 묘사. 결국 1심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선고.
#4. 유체이탈ㆍ동문서답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밝은 얘기만 써달라"
손길승 SK그룹 회장(2004.1.8 )
회삿돈1조원을 부당하게 사용한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며.
“이런 엄청난 불장난을 누가 했는지, 또 그 불장난에 춤춘 사람들이 누군지 밝혀지리라 생각한다”
정윤회(2014.12.10)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전.
“왜 여기서 조사를 받는지 모르겠다”
이상득 전 의원(2015.10.5)
포스코 비리에 연루돼 검찰에 출두하며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해야 하다니 불쌍하다. 잘 커주길 바란다. 아이고”
정명훈 전 시립교향악단 감독(2016.7.15)
항공료 횡령 의혹으로 종로경찰서에 출두하며
#포토라인이란
포토라인은 1993년 검찰에 출두하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취재 경쟁을 벌이던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부상을 입은 일을 계기로 탄생했다. 당시 한국사진기자협회와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는 취재 질서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약속의 선으로 포토라인을 선포, 제작했고 이후 한국인터넷기자협회도 참여했다. ‘PHOTO LINE’이란 글자와 함께 언론단체 명이 인쇄된 폭 48㎜의 접착식 비닐 테이프 형태로 검찰청뿐 아니라 취재 질서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현장에서 기자들이 직접 설치해 운용하고 있다.
취재 질서ㆍ안전 확보 위해 기자들이 직접 설치ㆍ운용
검찰청을 예로 들면 소환자의 지위나 혐의의 성격, 국민적 관심, 공공의 이익 등을 판단해 소환일정을 사전에 공개하고 취재진은 포토라인 안쪽에서 각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피소환자는 역삼각형으로 표시된 지점에 잠시 선 채 소회를 밝힌 후 조사실로 걸어 들어간다. 정의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이 신성한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든 약속을 깨는 순간 포토라인은 무너지고 만다. 포토라인의 생명은 자발적인 약속의 이행이다.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권수진 인턴기자(한양대 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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