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재 대표는 2013년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동생과 스타트업 회사를 차렸다. 이름은 ‘마이쿤’으로 지었다. 주요 사업은 완충된 스마트폰 배터리를 배달해주는 서비스였다. 하지만 많은 스마트폰이 배터리 일체형으로 등장하면서 주문 건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2015년 가을 폐업 위기까지 몰린 최 대표는 하드웨어가 아닌 문화콘텐츠 아이템으로 눈을 돌렸다. 모바일 개인 오디오 방송 서비스 ‘스푼’ 개발이 그렇게 시작됐다. 방향도 정해졌고 앱 개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표와 직원들이 연봉을 최대 80%까지 깎았지만 폐업 위기가 걷히지 않았다.
월세도, 보증금도 없는 문화창조벤처단지 입주는 그런 최혁재 대표에게 그야말로 솟아날 구멍이나 다름없었다. 업체 선정과 심사, 경쟁 PT와 서비스 소개까지 13 대 1의 경쟁을 뚫고 마이쿤은 지난 1월 단지 입주에 성공했다. 생명이 연장된 것이다. 3월엔 스푼 앱도 출시했다. 목표한 다운로드 수를 넘기고, 빠듯하지만 월 매출도 꾸준히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갈고 닦아나가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차은택 사건이 터졌다.
벼랑 끝 기회인 줄 알았는데, 차은택 낙인될 줄이야
청계천 변에 들어선 문화창조벤처단지. 일명 'Cel 단지’라 불린다. 7개 층을 쓰는 단지 안에는 게임, 캐릭터, 웹툰, 공연예술 등 문화산업과 연계된 일을 벌이는 스타트업 90여 개가 들어서 있다. 차은택 씨는 문화창조벤처단지 사업을 주도한 인물이다. 초기 단장을 지냈다. 지금은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의 틈바구니에서 문화산업계 전반에 걸친 비위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고름만 짜면 되는데, 이건 다리를 잘라버리는 격이라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청년들 등 떠밀어 창업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국정농단 사태와 한통속이라면서 예산 삭감하고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꼴이죠.”
최혁재 대표의 마이쿤을 포함해 단지에 입주해 있는 업체들은 불안하다. 단지 운영은 문화 콘텐츠 스타트업에 대한 국가지원모델인 만큼 예산 편성이 필수다. 사무공간 예산 지원이 끊기면 당장 길거리로 내쫓기는 업체도 부지기수일 터. 그러나 누구도 단지의 내년을 짐작하지 못한다. 지속가능성에 빨간 불이 들어온 셈이다. 차은택 꼬리표가 달린 이상 단지도, 입주사도 안정적으로 사업에만 집중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미디어피쉬’를 이끄는 전혜정 대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문화창조벤처단지 입주는 마치 벼랑 끝 기회를 잡은 것과 같았다. 그 기회가 1년도 채 안 돼 이렇게 낙인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회사 세울 때 처음엔 세 명이 동생 자취방에서 시작했어요.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이 홈페이지에 낸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됐어요. 마침 자취방마저 빼야 했던 상황이라 이곳 입주는 최고의 기회였어요.”
미디어피쉬는 스토리텔링 전문 스타트업이다. 오디오 드라마와 오디오툰을 기획하고 서비스한다. 동생 자취방에서 시작한 일이 사업이 됐지만, 동생의 결혼으로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단지는 월세와 보증금에서 자유롭다. 전혜정 대표에게 단지 입주는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셈이다.
단지 안에서 1년여를 보낸 지금, 당장 한두 달 안에 사무실을 구할 방도도 마땅찮다. 입주기업으로 선정된 뒤 사무실 보증금과 월세 대신 우선적으로 사업 재투자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국가의 지원은 입주 계약 동안에는 안정적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단지 안에는 이런 스타트업이 한 두 곳이 아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나가게 생겼다.
전혜정 대표는 “우리는 의혹이 있는 부분은 걷어내되, 이미 입주한 기업에 대한 지원 사업은 계속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차은택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만 있어도 대단한 특혜를 받은 비리 스타트업으로 낙인 찍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문화예산 대폭 삭감, 시한부 판정받은 벤처단지
문화창조벤처단지에 입주한 스타트업 대표들의 바람과 달리 국회의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교문위) 소속 국회의원들은 차은택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교문위가 11월 중순 완성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로 전달한 ‘2017년도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세입세출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심사결과’ 문서를 보면, ‘문화창조융합벨트구축’ 관련 예산은 400억원 수준으로 책정돼 있다. 이 부문의 예산 원안은 1,278억원인데 860억원이나 감축된 것이다. 문화창조벤처단지는 지난 2016년 입주 스타트업에 사무공간을 지원하기 위해 약 390억원 규모의 예산을 운용한 바 있다. 2017년 예산안에서 남은 400억원으로는 단지에 입주한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것도 빠듯하다는 얘기다.
교문위 위원장인 유성엽(국민의당) 의원실 관계자는 "우리는 문화창조벤처단지 관련 사업 자체가 최순실 씨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정책이었다고 본다"라며 "문화정책 전반에 최순실 씨가 각본을 짜고, 차은택 씨가 계획, 운영을 이어온 만큼 이 부분은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으면 덜어내 말끔히 해소하고 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문화창조벤처단지 사업의 주체인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도 입주기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진흥원의 Cel 벤처단지본부 관계자는 "국회에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도록 예산 관련 상담도 다니고, 의원들도 만났다"라며 "예산이 0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긍정적인 의견과 부정적인 의견이 분분한 만큼 업체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사무공간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확답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국회에서는 교문위의 예산안이 예결위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혹은 이보다 조금 더 감축될 가능성을 예상하는 의원실도 적지 않다. 예결위 위원장 김현미(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도 "이번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한 예산은 전액삭감을 원칙으로 보고 예산을 심사 중"이라고 설명했다. 교문위에서 짠 예산안 심사결과는 예결위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해 12월 2일 확정될 예정이다.
“문화예술 지원 암흑기 찾아올까 걱정"
당장 살림도 문제지만 앞날도 걱정이다. 이번 일로 정부의 문화예술산업 관련 지원이 소원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다. 문화창조벤처단지 사업에는 딸린 사업이 많다. 스타트업 사무 공간 사업 외에도 교육을 위한 아카데미와 지역 거점 육성계획 등이 포함돼 있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문화콘텐츠 육성 사업만큼은 산업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굴릴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국내에서 작가나 웹툰, 공연과 같은 분야에 한 번이라도 정부가 나서 대규모로 지원했던 적이 있었나요. 천만 관객이 넘은 영화, 아니면 일부 게임뿐이었습니다. 이번에 이 같은 사업으로 지원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드디어 국내에서도 장기적인 시각을 갖고 육성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긍정적으로 봤어요."
전혜정 대표는 "아무것도 없던 땅에 드디어 씨앗이 심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사태로 또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국가 어젠다에서 장기간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미디어피쉬는 마이쿤, 재담미디어와 함께 융복합 콘텐츠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재담미디어가 확보한 콘텐츠의 지적재산권을 활용해 미디어피쉬가 오디오 드라마와 오디오툰을 기획하면, 마이쿤이 서비스하는 방식이다. 마이쿤, 재담미디어와의 인연도 문화창조벤처단지 입주 덕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분야의 일을 하는 많은 업체가 있다는 점도 단지 조성이 이룬 성과 중 하나다.
황남용 재담미디어 대표도 "여러 대표님이 사업 제안을 주신 덕분에 오디오툰 등 융복합 사업을 진행하는 중에 이런 사건이 터지면서 의기소침해진 것은 사실"이라며 "지금은 밖에서 우리를 색안경 끼고 보는 분위기여서 침울하다"라고 말했다.
오원석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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