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술이라도 마시고 무대 올랐나요?”
지난 달 2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공연이 끝난 후 기획사 관계자는 이런 문의전화를 받았다. 질문의 주어는 도밍고가 아니라 함께 무대 오른 신인 소프라노 박혜상(28). 이날 도밍고와 오페라 레골레토의 이중창 ‘당신 아버지에게 말하지 마오’, ‘왈츠 듀엣’ 등을 함께 부른 박혜상은 적극적인 구애 연기를 펼치며 불세출의 거장마저 당황하게 만들었고 모든 출연자들이 함께 부른 앙코르곡 ‘축배의 노래’에서는 춤까지 선보였다.
“무대 오르기 직전 도밍고가 노래 부르며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액팅을 주시더라고요. 그대로 한 건데 제가 무대에서 흥이 나면 주체를 못해요(웃음).”
박혜상은 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쑥스러운 듯이 그날 공연을 회상했다. 깔끔한 발성과 한국인답지 않은 적극적인 연기, 작고 또렷한 마스크, 악바리 근성과 배포. 스타 성악가의 조건을 모두 갖춘 그가 무섭게 떠오르고 있는 건 당연한 일. 8일부터 11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국립오페라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도밍고 공연으로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사실 해외에서 뜬 건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사 IMG와 계약하면서부터다. 서울예고, 서울대를 거쳐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했던 그에게 기회가 온 건 2년 전. 줄리어드 마스터클래스에 참관했던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의 매니저 잭 마스트리아니가 박혜상에게 이탈리아에 오면 연락하라고 제안했고 “오페라 ‘이탈리아의 터키인’의 연기를 본 후” 그녀의 매니저가 됐다. 1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루살카’를 비롯해 내년 해외 출연이 확정된 오페라만 5편에 이른다.
기회를 거저 얻은 건 아니다. 배역을 한번 맡으면 관련 DVD를 모두 사보고 오페라 원작 대사까지 달달 외운다. 이런 깡으로 2014년 퀸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5위를 시작으로 2015년 몬트리올 국제콩쿠르 2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 여자부문 2위, 2016년 제르다 리스너 재단 국제콩쿠르 1위를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박혜상은 “줄리어드 삼수 해서 들어갔다”며 “유학 준비 때 오브리(Obligatoㆍ행사 반주) 뛰면서 학비 마련했는데 뉴욕 물가가 비싸 6개월 만에 다 없어지더라”고 말했다. “여기(보도자료를 손으로 가리키며) 적힌 콩쿠르 입상 경력 있잖아요. 이거 다 상금 번다고 나간 거예요. 생계형 참가! 유학 3년째인데 부모님 도움 안 받았어요. 그러면서 더 성숙해졌죠.”
국내 오페라 주역 데뷔작인 ‘로미오와 줄리엣’ 준비에도 이런 성격이 묻어난다. 박혜상은 이 역할을 위해서 국내 출시된 관련 공연 DVD를 모두 사봤다. 원작 영어 대사도 달달 외웠다. 무려 7년 전에. “매년 대학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각 대학이 전막 오페라를 공연하는데요, 대학 4학년 때 저희 학교가 할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소문이 있었어요. 한 달 간 죽자고 공부했는데 ‘라 트라비아타’로 바뀌었죠. 드디어 꿈이 이뤄졌네요.”
박혜상표 줄리엣은 ‘이성적인 시인’이다. 기분에 한껏 취해 두 팔 벌려 셰익스피어 영어 대사를 읊던 그는 “줄리엣은 ‘당신을 위해 내 이름을 버리겠다’고 말할 만큼 용기 있으면서 한편으로 이 사랑이 안 된다는 걸 이성적으로 아는 여자”라고 말했다. “어둠과 밝음이 묘하게 섞인 감정을 끌어내고 싶어요.” (02)580-3540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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