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을 여행할 때였다. 자그마한 마을 알리아바드에서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무심히 창밖을 보다, 까만 손으로 신발을 고치고 있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라 시선을 돌리려는 찰라, 아저씨의 환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화답했다.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아저씨의 미소는 따뜻한 차 한 잔 같았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연필을 꺼내 적었다. 여행이란 모르는 사람과 미소를 나누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세상에는 물과 공기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진짜 중요한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여행 전에는 그것이 지닌 메가톤급 파워를 미처 몰랐던 것이 있다. 바로 미소다. 미소만 있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 입꼬리를 조금 올리면 눈 밑에 살짝 주름이 지어진다. 그 정도면 된다. 굳이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보니, 미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미소야말로 여행자가 준비해야 할 필수품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세계여행 대선배 김찬삼 선생은 ‘웃음은 진정한 에스페란토’라고 했다. 김찬삼 추모사업회에서 발간한 책에 따르면, 그는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 고귀한 것이 아닐까”라며, 1958년 1차 세계일주를 떠나기에 앞서 미소 짓기 훈련을 했다고 한다. 김찬삼 선생은 세계를 여행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위험에 직면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미소 덕분에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멕시코 오아카에 있는 전통 시장에 갔을 때였다. 할머니 한 분이 좌판에서 벌레처럼 생긴 튀김을 팔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무엇이냐 물으니, 할머니는 대뜸 옆에 앉으라고 했다. 할머니는 튀김에 대해 손발까지 사용하며 열심히 알려줬다. 할머니는 속사포 같은 설명을 끝내자마자, 하나를 덥석 집더니 무방비 상태의 내 입에 쏙 넣었다. 거절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보기와 달리 매콤한 맛이 그만이었다. 앉은 김에 할머니와 함께 튀김을 팔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매우 맛있다’는 뜻의 ‘무이 리코(muy rico)’를 외쳤다.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더니,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튀김 부스러기만 바닥에 남았다. 완판! 할머니는 더없이 큰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할머니의 까만 얼굴에 수십 결의 미소 주름을 선물했다. 할머니와 나는 승리를 축하하는 눈빛을 나누며 진하게, 그리고 조금 오래 포옹했다. 심심하게 지나칠 수 있었던 오후가 싱싱하게 채워졌다. 단지 미소 한 조각으로 말이다.
웃음의 위력을 알게 된 후 여행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내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니, 다른 이들도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줬다. 미소에 행복감이 스르르 번졌다. 눈빛만으로 이런 행복감을 안을 수 있다니, 미소의 힘은 체험할수록 놀라웠다.
여행하며 웃던 버릇은 집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부작용도 없진 않아,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친구들은 “좋은 일 있어”라고 물었고, 특별한 일 없다 하면 “뭔가 있는데, 나한테만 안 알려주는 거지”라며 서운해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오해를 받는 일은 다반사. 미소를 받은 이들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하는 표정을 지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3년 전 서울 외곽으로 둥지를 옮겼다. 옛집이 그리울 만도 하건만, 새집에 금방 마음을 붙였다. 미소를 지어준 동네 사람들 덕분이었다. 17층이라 엘리베이터에서 주민들과 마주칠 일이 잦은데, 그때마다 어른이든 아이든 살짝 미소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좋은 동네란,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소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없던 인연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우리를 위험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미소를 짓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앞으로도 여행에서 배운 미소의 힘, 미소 바이러스를 여기저기에 더 많이 살포할 생각이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오늘. 따뜻한 미소 팩을 한 바구니 준비할 참이다.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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