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기준은 ‘다양한 주체 기술’
실제론 노동자 노력 단 두 문장
총수 소개는 낯뜨거운 위인전 수준
전경련의 건의문 그대로 반영
“아름다운 일만 해 왔다고 묘사”
“현실 교육에 도움 안돼” 비판론
역사 국정교과서의 재벌 서술이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다루지 못하고 미화하는 데에 치우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4일 역사학계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기업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우선 경제 성장이 박정희 정권과 재벌들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처럼 쓰였다는 비판이 많다. 교과서 집필 기준은 ‘정부, 기업, 근로자 등 다양한 경제 주체들의 노력을 기술’하도록 돼 있으나 공개된 고교 ‘한국사’를 보면 노동자ㆍ농민ㆍ소상인 등의 노력은 생략돼 있다. 이들이 언급된 부분은 “1960~70년대 노동자들은 또 다른 경제 성장의 주역이었다”(269쪽)와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정부ㆍ기업ㆍ근로자가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279~280쪽) 등 두 문장이 전부다. 저임금 여성 근로자와 파독 광부ㆍ간호사, 베트남에 파견된 병사ㆍ근로자 등 근면한 국민의 노동력을 기업인과 같은 비중으로 다룬 검정교과서(미래엔 339쪽)와 대조적이다.
삼성ㆍ현대그룹 창업주인 이병철ㆍ정주영을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와 함께 대표적 한국 기업인으로 조명한 고교 ‘한국사’ 267쪽도 기업인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정주영이) 대규모 조선소 건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영국 투자 은행에 보여 주며 ‘우리는 이미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는 대목은 위인전에서나 볼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반면 재벌 체제의 부작용은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되었고, 정경유착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는 한 줄로 간단히 요약됐다.
이에 비해 검정교과서(미래엔)는 “물건 하나라도 더 수출하기 위한 기업인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했다”면서도 “대표적인 기업인들은 각종 혜택을 악용하여 횡령과 비자금 조성을 일삼고 세금을 포탈하거나 수출 대금을 해외로 빼돌렸다”고 균형을 맞췄다(340쪽).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교수는 “국정교과서로 국가가 특정 기업을 홍보해주는 꼴”이라고 질타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 관련 서술도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와 외국 투자자들의 대출 회수만 배경으로 지목해(277쪽) 정부와 대기업의 책임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또 검정교과서에서는 상당 지면이 할애됐었던 ‘전태일 분신 사건’은 국정교과서에서 “근로기준법 개정 요구가 매번 묵살되자 1970년에 분신 자살하였다”는 한 문장의 사진 설명으로 축소됐다(269쪽). 공교롭게도 이런 서술 변화에는 2011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정부에 낸 건의문 내용(“역사 검정교과서가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에 비해 이병철ㆍ정주영을 홀대하고 있다”)이 그대로 반영됐다.
학계는 국정교과서 집필진에 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한 명도 없고, 뉴라이트 계열 경제학자가 대거 참여하면서 이런 결과가 예견됐다고 주장한다. 왕현종 연세대 원주캠퍼스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이 교육과정ㆍ집필기준을 위배하면서 기업 위주로 서술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신철 교수는 “현재 국정 혼란의 핵심 원인이 정경유착인데 국정교과서만 봐서는 그 역사적 연원을 학생들이 알 수 없을 것”이라며 “오히려 기업이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하고 경제에 기여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리둥절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꼬집었다.
한편 교육부가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간에 체결된 ‘위안부 합의’를 의식해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을 축소ㆍ삭제한 정황도 드러났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역사교과서국정화저지특별위원회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받은 국정역사교과서 원고본(초고) 외부검토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12ㆍ28 합의를 반영할지 여부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원고본에 실려 있었던 ‘트럭에 실려가는 한국인 위안부’ 사진이 “감정에 호소하는 기술”이라는 지적 등이 보고서에 있었다. 해당 사진은 현장검토본(시안)에서 빠졌다. 외부검토보고서는 국편이 위촉한 전문가 13명이 만든 보고서로, 검토진 중 10명이 정부 산하기관 관계자다. 특위는 “일본 눈치를 보며 만든 교과서를 당장 폐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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