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마다 연도가 써 있을 텐데, 큰 의미는 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허수영(33) 작가는 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신의 작품 ‘산양리11’를 설명하던 중 이렇게 덧붙였다. 경기 이천시 산양리 소재 금호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2013) 당시 그렸으나 “‘뭔가 부족하다’ 싶어 올해 다시 덧칠했다”는 이유에서다.
뿐만 아니다. 2013년 개인전 이후 작업한 16점 모두 그리고 또 그렸다. 이미 도록에 싣고 전시까지 마친 작품을 허 작가는 다시 꺼내 “자신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고 침투할 수 없을 때까지” 그리기를 반복한다.
가장 주목 받는 신세대 작가로 최근 몇 년 동안 수 차례 레지던시에 선정된 그는 짧은 머무름을 두껍게 덧칠한 회화로 남겼다. 레지던시 기간 동안 한 장소를 거의 매일 방문하고, 마주한 모든 것을 캔버스 위에 겹쳐 그린다. 하나의 캔버스 위에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려야 하기에 3년 반 동안 그린 작품이 겨우 16점뿐인 것도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그리며 지우는 역설. 그가 보았다는 꽃과 풀, 나무와 산은 한 눈에 발견되지 않는다. 처음의 풍경은 다른 풍경이 되고, 사계절이 한 캔버스 안에 혼재하기도 한다. “시야에 가려진 것들도 최대한 담아내, 캔버스 안에 모든 사물을 존재시키는 게 목적”이라며 그는 “조금이라도 진실된 표현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 같은 방식을 택했던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손을 언제 떼야 하는지 결정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는 그는 한때 책 한 권을 골라 ‘이 책을 읽을 때까지만 그려야겠다’는 식으로 끝을 정해두기도 했다. “임의로 끝을 정해두는 게 점점 어색해졌다”는 그는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그림들을 수정하기 시작했고, 특정 작품의 밀도만 높아지니 다른 작품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물감을 칠하기 어려울 정도로 덧칠을 했을 땐 칼로 물감을 밀어내는 작업도 한다.
2년 전 아프리카 여행이 가져온 변화도 크다. ‘시각적 자극으로 감정의 극단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에 의문을 가졌던 허 작가는 마치 은하계 안에 존재하는 것 같은 아프리카의 밤 하늘을 보고 처음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그림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고, 작은 점들을 하나라도 더 찍으려고 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부족한 그림을 메우려는 시도”로 시작한 끝없는 붓질은 “이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됐다.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때 겨우 마친 그림도 시간이 지나면 빈틈이 보입니다. 그리는 일에는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제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결국 ‘고생한 흔적들’ 아닐까 싶습니다.” 전시는 9일부터 내년 1월 8일까지 열린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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