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 안 되는 나트륨등은 노란 안개를 샤워기마냥 쏟아내고 있었다. 교차로랍시고 서 있는 신호등은 지 색깔도 못 바꾸고 껌벅거리기만 했다. 그나마 밤 안개는 아침 것 보다 따뜻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밤 안개’ 부분에서 ‘현미’가 떠 올랐다. 백미 말고 현미가 아니라 한명숙 말고 현미. 한명숙도 총리였던 사람 말고 ‘노란 샤쓰 입은’ 한명숙. 요즘 애들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노래를 시작한 사람들이 굳이 왜 떠올랐을까. 이젠 기억도 나이보다 늙어가는 건가.
저녁 늦게 아들놈을 학교 앞에 내려 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피곤했다. 학교 임원이라고 담양에 가서 무슨 회의를 해야 한다고 해서 데려다 주긴 했는데, 올 때 알아서 오라고 했더니 저녁이 다 돼서 도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담양에서 구례로 오는 교통편이 없고, 남원을 거쳐서 와야 하는데 배차시간이 애매해 기숙사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진다고 했다. 아빠는 택배도 보내야 하고 어차피 바로 출발하기 어려우니 남원까지 오라고 했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에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기도 없다고 했다. 걱정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합실에서는 국정농단을 따지는 청문회가 중계방송 되고 있었다. 재벌 두목들에게 한 국회의원이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존경하고 이러고 싶지 않지만 국민을 대신해서 여쭤보는 것이니 이해해달라.” 개인적으로는 책상을 타고 넘어가서 한 대씩 갈겨주고 싶다는 국민들의 심정과는 달랐다. 그래서 묻는 말에는 “여기서 답변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부적절하게 살아서 불려 나온 것들이 꼭 마이크 앞에 앉으면 ‘적절 타령’이다.
다른 국회의원이 따졌다. “당신들이 한다는 기부 행위가 사실은 기브 앤 테이크 아니냐.” 그들은 아니라고 말 못했다. 문득 몇 해 전 생각이 떠올랐다. 선재가 중학생 때 용돈을 주면서 “다음 주 엄마 생일이야” 했더니 “기브 앤 테이크네” 하고 말했다. 사실 얘는 영어에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하루는 기타를 치며 ‘렛잇비’를 부르길래 “뜻은 아냐?” 물었더니 “가사가 좀 이상해. 왜 엄마가 결혼하자고 나한테 와서 말해?” 되물었다. 뭘 보고 그러나 했더니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맞잖아” 우겼다. 이번에도 느낌이 약간 애매해서 기브 앤 테이크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선재는 자신 있게 답했다. “줬다 뺏기!” 내내 애매했다. 어쩌면 그 해석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담양에서 오는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무슨 일 났나 걱정하는데 운전기사가 차내를 둘러보다가 뭔가를 발로 툭 차니 등받이 위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 선재였다. 화장실 간 사이에 버스를 놓쳤고, 또 어떻게 될 지 몰라 연락을 못했단다. 화장실 가느라고 큰 일을 못 할 거라는 말은 아빠까지만 들으면 좋겠는데.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약속을 했으면 시간보다 늦어진다고 알려줘야지, 그게 기본이야.”
읍내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 먹이고 학교에 들여보내고 나니 밑불 대 놨던 왕겨훈탄이 궁금했다. 왕겨를 태워 만드는 숯으로 땅에 뿌려주면 여러모로 좋다. 연통을 꽂은 채 원뿔형태로 왕겨를 쌓고 밑불만 붙여 놓으면 되는데 막판 관리가 중요하다. 농장에 가 보면 될 일을 피곤이 가로 막았다. 숯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까딱하면 몽땅 재가 될 수 있으니 상태를 보고 물이라도 한 번 뿌려 줘야 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냐는 노래가 불길하게 생각났지만 과감하게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농장에 도착하니 왕겨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부랴부랴 물을 붓고 남은 훈탄이라도 건지려고 우왕좌왕 하는데 장씨아저씨가 들어오셨다. “뭔 불장난이여?” 오랜만에 오시니 반가웠다. “왜 그렇게 안 들르세요. 허리는 좀 어떠세요.” 여쭙고 보니 안색이 안 좋았다. 지난 봄에 수술하신 뒤로 아무래도 불편하다고 하셨다. “몸이 안 좋으니까 심사도 뒤틀려. 다 귀찮아지고. 그 전 같으면 봐줄만한 일도 못 참고 해대고……” 왠지 목소리도 작아지신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비닐하우스에 오이 재배 준비를 시작하시느라 더 힘들어 보이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년 봄에는 다시 ‘칠순 청년’의 모습을 뵈면 좋겠는데. “애쓰시게. 뭐든 열심히 하는게 좋지.” 아저씨는 차 한 잔도 마다하시고 집으로 올라가셨다.
훈탄을 밭에 뿌리고 나서 전 이장님댁을 찾았다. 5년째 나락종자를 자가 채종했으니 바꾸는게 좋겠다는 주변 사람들 말을 듣고 어떻게 하는게 좋을 지 여쭤보고 싶었다. “밥 맛은 옛날 다무락 논에서 짓던 다마금이 최고여.” 아버님은 지금 쌀들은 밥맛이 예전만 못 하다고 말씀하셨다. 배고픈 시절이니 더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다. 간전댁할머니 말씀도 그랬다. 옛날에 거지가 밥을 좀 달라고 하길래 차려주마 하시고 대신 찬은 션찮다고 하셨단다. 거지 왈 “반찬은 갖고 다닝게 걱정 마쇼.” 하며 배를 두드리더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어쨌든 다마금을 지금 구할 수는 없고, 정부수매 품목은 아니지만 맛이 최고라고 추천 받은 종자 몇 개를 말씀드리니 그 중에 하나 하면 되겠다고 하셨다. 세세한 조언이 아니더라도 결제를 받은 것 같아 좋다. 부엌에서 감을 들고 들어오시던 오봉댁어머니가 “내일 와서 고기 좀 잡숫고 가요” 말씀하셨다. 김장하신다는 말씀은 들었다. “언제쯤 하세요. 힘 쓰는 거라도 도와드려야죠.”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침에 헝께로 걱정말고 점심이나 잡수시러 와요.” 아침에 오라는 말씀인지, 어차피 못 올 거면서 뭔 인사치레냐 와서 밥이나 먹어라 하는 말씀인지 애매했다. “네. 어쨌든 내일 아침에 올게요.”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안방으로 들어와 TV를 켰다. 광고가 나오는데 한 꼬마애가 말했다. “우리 엄마아빠는 약속을 참 잘 지키십니다. 동생도 꼭 만들어준다고 약속하셨어요~” 동생을 만드는 내막을 뭔가 안다는 표정이었고, 주변 아이들도 머릿속에 뭘 그렸는지 깔깔대며 웃었다. “쪼맨한 것들이 뭘 안다고 저렇게 응큼한 표정으로 웃어!” 아내는 쓱 쳐다보더니 대꾸도 안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몸이 안 좋은지 요즘 괜한 것에 불끈하고 한다. 발랑 까진 애들이라기 보다 성교육이 잘 된 학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내는 손을 만져보라며 내밀었다. 내가 느끼기엔 따뜻한데 아내는 불이 나는 것 같다고 했다. 발도 그렇단다. 촛불, 횃불, 들불보다 뜨거운 게 갱년기 여성의 열불이라고 했다. 몸만 뜨거운 게 아니라 마음도 그렇단다. 손발이 뜨거운 것과 가슴 속 열불의 전후관계나 인과관계가 어찌되는 지 몰라도 불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좋다. 그러고 보니 며칠 뒤가 아내의 생일이다. 긴장 주간이다.
결혼 전 아내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약속이 있다. “매년 생일상은 내가 차려준다!” 아내도 좋아했고, 약속대로 이행했다. 한 상 떡 벌어지진 않아도 육해공을 감안해서 차렸다. 부작용이라면 매년 만족도가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과,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변 남편들과 멀어졌다는 점이다. “미역국은 끓여 줄게” 했다가 반찬을 슬슬 늘려 갔다면 만족도가 유지됐을 텐데, 첫 스텝을 잘못 밟은 거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20년 만에 장미 한 송이로 아내를 감격시켰다는 누구에 비해 수고로운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내는 매년 그 이상의 생일상을 차려준다는 점, 그나마 지키는 약속이라고는 달랑 그거 하나라는 점이 기꺼이 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뭐 먹고 싶어?” 물으니 아내는 “미역국만 끓여 줘. 나가서 먹어도 되고”라고 답했다. 매년 똑 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그 말을 믿을 만큼 모지랭이는 아니다. 아직 며칠 여유가 있으니 몇 번 더 물으면 가지 수도 늘어날 거다. 조금만 있으면 장모님이 끓여 준 미역국보다 내가 더 많이 끓여주게 된다. 맨날도 아니고, 일년에 한 번 자기를 위한 밥상 받을 자격은 충분하게 살아오지 않았겠나. 무엇보다도 한 번 약속한 것이니만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누운 채로 뉴스를 검색하다 보니 청문회는 수준 이하였고, 그 와중에 재벌들의 면세점 입찰은 진행될 거고, 저 남쪽 끝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영결식 열린 날 서울 한복판에서는 일왕 생일잔치가 열렸단다. 세상이 똥밭이다 보니 방귀 몇 방 뀐다고 냄새 나겠냐는 심사인가 보다. 나도 열이 나기 시작했다. 갱년기 열불은 대기를 통한 호흡기 전염성이 강한가 보다. 접촉도 없었는데.
눈을 떠 보니 동창이 훤하다.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다. 전 이장님댁 김장이야 어차피 내가 김칫속 넣을 것도 아니고 끝날 때쯤 청소작업이랑 운반작업만 하면 될 터이다. 슬슬 차려 입고 건너가 보니 조용하다. 아직 시작을 안 하셨나 하고 뜰방에 올라서며 “엄니~” 소리지르니 “어여 들어와요.” 하신다. 밥상에는 김치와 돼지고기 수육이 놓여 있고, 오봉댁어머니는 지친 표정이다. “어여 고기 잡싸.” 다 끝났다는 말씀이다.
‘이게 아닌데’ 하는 심정으로 엉거주춤 서서 “아니 벌써 끝내셨어요?” 하는데 어머니가 울리는 전화기 폴더를 열었다. “잉, 아유 애썼네. 나가 못 가봐서 으쩌까. 애쓰쇼이” 전화를 접으며 말씀하셨다. “대평떡(댁)네도 끝났다는 구마. 세번째 집으로 가는 중이랴.” 미리 고지한 D-Day 전날까지 김장 준비를 마치면, 마을 어머니들이 단체로 돌아가면서 각 집의 김장을 해치우는 방식이다. 그 중에 이장님댁이 첫 집이었고 9시가 채 안된 시각에 3호점을 마무리하러 가시는 거다. 그런 상황에 “벌써”라는 말이나 하고 앉았으니…… 고기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무리 청소라도 하려고 나서는데 어머니가 말리셨다. “어여 가요. 선재 즈그 아빠 이녁 일도 바쁜디. 이거 갖고 어여 가세요.” 김치통을 가리키셨다. 1분 뒤,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김치통을 들고 트럭에 앉았다. 엊그제 선재한테 얘기했던 입이 계속 간지러워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간다. 약속은 기본이니 어쩌고저쩌고?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언제쯤 제대로 살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기브는 없고 테이크만 있는 세상.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