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19 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 10월 최인훈은 소설 ‘광장’을 발표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기간을 그린 그 소설 주인공 이명준은 ‘밀실’만 있고 ‘광장’은 없는 남한을 피해 월북하지만 그곳은 ‘광장’만 있고 ‘밀실’은 없는 곳이었다. 그는 “밀실은 허위로 가득 차 있으며, 광장은 비어 있거나 혹은 죽었다”고 절망한다. 소설이 발표된 후 56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 개인이 진솔하게 숨 쉴 수 있는 밀실이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남한에서는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낄 수” 있게 됐다. 10월 29일 청계광장에 모인 5만명(이하 주최 측 추산)의 촛불은 한 달여 만인 12월 3일 232만명으로 늘어났고, 12월 17일 8차 집회까지 연인원 800만명을 넘어섰다. 그 사이 ‘촛불집회’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평화적 ‘촛불혁명’으로 진화했고, 광장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거대한 교실이 되고 있다. 10월 29일 이후 매일 진행되는 집회 관련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 공동대변인 안진걸(44)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을 만나 이 경이로운 ‘광장’에 대해 들었다.
5000명 예상한 첫 촛불집회
5만명 청계광장 메워 놀라
부랴부랴 1500개 단체 연대 구성
_이번 촛불 집회는 일반 시민의 자발적 참여라는 면에서 이전의 집회와 구분된다. 작가 이문열은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가 (북한) 아리랑 축전같이 거대한 집단체조 같이 느껴졌다”며 또다시 낡은 배후세력론을 꺼내 들었으나, 보수층으로부터도 별 호응을 얻지 못했을 정도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나.
“10월 29일 첫 촛불집회는 노동시민단체들의 민중대회로 예정돼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11월 12일 민중총궐기대회로 이어갈 예정이었다. 집회를 준비하던 노동ㆍ민중단체는 이 집회에서 농민생존권,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석방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같이 절실한 이슈들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나 2011년 반값등록금 집회 2012년 한미FTA 반대 집회 이후 사실상 5만명 이상 모인 대규모 집회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래서 많이 모여야 5,000명 정도일 것이며, 그 정도도 어디냐 했다. 그런데 그날 현장에 가보니 5만명이 청계광장을 가득 메우고 그 힘으로 경찰이 불허한 광화문광장까지 진출했다. 1년 전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곳이 시위대의 광화문광장 진출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경찰 차 벽 앞인데 그렇게 쉽게 열린 것이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과 분위기도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경찰도 무리하게 막지 않은 듯하다. 평소 같았으면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있으니 채증해서 체포할 수 있다’고 경고했을 텐데 그 날은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방송했다. 해당 지휘자가 다음날 청와대로부터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더라. 이렇게 달라진 분위기 속에 원래 집회를 준비했던 노동ㆍ민중단체들도 준비했던 구호를 뛰어넘어 박근혜ㆍ최순실 규탄과 박근혜 퇴진에 집중하게 됐다. 이번 촛불집회의 성공엔 이들 노동ㆍ민중단체의 대승적 조정과 헌신이 큰 몫을 했다. 그 집회 이후 급하게 1500여 개 시민단체가 연대한 퇴진행동을 구성하고 11월 4일 2차 집회부터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3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비상시국회의를 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우선 협의체 명칭부터 박근혜정권 퇴진과 여타의 중요 이슈를 결부한 국민운동본부로 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박근혜정권 퇴진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사건의 실체가 속속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그에 맞춰 구호들을 정했다. 우선 박근혜ㆍ최순실 비리 진상규명과 엄벌, 박근혜 퇴진 등으로 구호를 최소화했고, 논의 끝에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구호도 쓰기로 했다. 다음 집회 참가자들도 사전에 준비된 이런 구호를 자연스럽게 수용했다. 이후 집회가 거듭되면서 다른 의제들이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세월호 7시간 진상규명,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반대 등이 그것이다.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일군사협정과 위안부합의 문제 등 이야기를 많이 꺼내더라. 퇴진행동은 현장과 온라인을 통해서 걷힌 기금들로 무대를 준비하고 행진을 기획하는 일은 물론, 참가자들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는 일, 임시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일, 법원으로부터 집회허가를 받는 실무적인 일에도 주력하고 있다.”
시민 자유 발언 절반 넘고
평화시위에 대한 자부심 대단
장애인ㆍ성 차별 민감도도 높아
_지금까지 집회가 미리 정해진 연사들의 발언을 일방적으로 듣고, 그들이 선창하는 구호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촛불 집회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가 시민들의 활발한 자유발언이었다.
“자유발언은 2008년 촛불집회 때도 있었다. 그때는 미리 정한 단체대표들의 발언이 70%라면 자유발언이 30%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자유발언이 훨씬 많다. 절반 이상이다. 시민들이 그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 화제가 된다. 유튜브에 올라가면 몇십만명이 보기도 한다. 예전에는 집회 무대에 올라 발언하면 경찰 등이 채증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제 전 국민이 응원해주니까 더 적극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 같다. 10월 29일 1차 집회 때부터 자유발언 신청이 쏟아졌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노회찬 정의당 의원도 자유발언을 신청해 무대에 올라간 거다. 11월 5일 집회는 중고등 학생들이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전국에서 동시에 집회하니 80~100군데 지역에서 열린다. 자유발언 무대를 늘려달라는 요구가 많아서 11월 19일 4차부터는 행진하는 곳마다 무대 차량을 세워서 자유발언을 하도록 했다. 광화문 자유발언 무대의 경우 ‘자유발언 할 분들 모이세요’하면 금방 200명씩 줄을 선다. 이번 집회에는 ‘행포시위대’도 등장했다. 행진을 포기한 시위대의 준말로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지 않고 그냥 무대 앞에 남아서 공연을 보고 자유발언을 듣는 사람들이다. 행진하다 경찰이나 탄핵반대 시위대와 충돌이 생길 수 있다며, 행진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 평화시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11월 13일 3차 집회 당시 내자동 로터리에서 버스 위로 올라간 사람이 1명 있었다. 그때 시민들이 모두 내려오라고 외쳐 충돌을 저지했다. 경찰버스에 꽃을 붙이고, 심지어 떼기 어려울 것 같다고 직접 떼주기까지 한다. 정말 아름답고 평화롭지 않나.”
_공연참여자 중 DJ DOC의 노래 가사와 관련해 여혐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여성이나 장애인 성적 소수자 관련 차별과 편견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진 것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문제의 본질이 권력자들의 국정농단과 심각한 비리임에도 규탄대상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집회 초기부터 ‘아녀자’ ‘강남 아줌마’ 같은 표현들이 나온 것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았다. 게다가 공교롭게 올해가 ‘병신년’(丙申年)이어서, 이를 빗댄 조롱도 나왔는데 이 역시 삼가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장애인 비하와 여성 비하가 발언이 나올 때마다 ‘광장에 여성과 소수자가 많이 참여하고 있다’며 SNS 등을 통해 항의가 빗발쳤다. 11월 5일 2차 집회 때 사회자와 일부 자유발언자의 발언에 대해 11일 사과문을 올렸다. 우리나라 집회 사상 처음으로 ‘인권집회수칙’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동물 비하도 하지 말자는 의견도 나왔다. DJ DOC 논란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고 결국 문제 가사를 고쳐 서울광장에서 별도로 공연을 했다. 모두 더 좋은 세상 바라며 광장에 나온 것 아닌가. 광장에서까지 소수자나 약자에게 불쾌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이라는 염원이 우리가 주권자라는 자각으로 확장되면서 최소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광장에서는 소수자 비하적 표현을 삼가자는 각성과 합의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광장에서 이뤄낸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이나 2008년 촛불집회를 합쳐 놓은 것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수백만명의 생각이 쏟아지면서 온ㆍ오프라인에서 치열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정권에 대한 분노가 직접 민주주의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朴 퇴진 표명ㆍ탄핵… 두번의 승리
언젠가 퇴진행동 해산하더라도
상식ㆍ정의 회복 위해 노력할 것
_냉정하게 말해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요구는 아직 어느 하나 실현되지 않았다. 정권이 퇴진한 것도 아니고, 탄핵이 성사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추위도 있고, 국회의 탄핵 소추 이후 촛불의 동력은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언젠가는 광장의 열기가 식을 것이다. 17일까지 8주째 계속되는 대규모 집회인데. 탄핵 소추가 이뤄진 이후 집회 인원이 줄었는데 그렇다고 촛불이 흔들리는 건 아니다. 국민의 70%가 흔들림 없이 헌재 결정 이전에 대통령은 퇴진하라고 외치고 있다. 퇴진 후에는 퇴진행동도 해산해야 할지 모른다. 이후 대선이나 개헌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다를 테니까. 그래도 촛불집회로 이룬 공감대인 민주주의의 회복, 국민주권의 실현, 상식과 정의의 회복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아래서 박근혜정권퇴진 이후에는 어떤 정책이 더 나은지 개헌을 해야 하는지 의견을 수렴할 온라인 촛불집회 등을 구상할 수도 있다. 우린 이미 두 번의 승리를 이끌어냈고 광장에 모일 때마다 매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우리 국민들이 해냈다. 첫째, 대통령이 퇴진의 뜻을 밝혔고 둘째, 탄핵소추가 가결됐다. 1월 말까지 탄핵이 가결되거나 자진퇴진하면 세 번째 승리가 될 거다.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경제정책을 펴는 것, 국민을 위한 나라로 가는 것이 네 번째 승리가 될 거로 생각한다. 물론 네 번째 승리는 퇴진운동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정리=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 4차 촛불집회 '시민발언대' 영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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