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한테나 어울릴 듯한 구름이 잔뜩 어둠을 내렸다. 비 오기 직전의 푸른 빛은 어릴 때나 좋아했지 요즘은 그냥 보기에도 춥다. 동짓날 짧은 햇볕을 받지 못한 농막은 축축하고 서늘했다. 화목난로를 때자니 귀찮았고, 초반에 뿜어댈 연기가 메스꺼운 속을 건드릴 것 같았다. 대안을 생각하다가 그냥 캠핑의자를 펴고 그 밑에 가스히터를 켜 놓으니 엉덩이 하나는 충분히 지질만 했다. 스스로 ‘머리통 크기에 비해 잔머리는 뛰어난 편’이라고 자찬하며 일을 시작했다.
뽑아두고 정리 못한 무 다발들을 정리했다. 무 뿌리보다 줄거리를 말려서 시래기를 만들어보고자 종자도 그런 것으로 구입했다. 당시 종묘상 주인은 1천원 비싼 종자를 내밀며 자신감을 비쳤다. “이거이 무도 웬만하고 줄거리는 엄청나게 벌어징게 절대로 배게(촘촘하게) 심으믄 안돼야” 하지만 결과물로 나온 시래기는 남들 일반 무보다 작았고 뿌리는 더 작았다. “중간에 웃거름을 잘 해야 혀” 라고 했던 어르신들 말씀을 듣지 않은 건 내 잘못이다. 아니, 웃거름 없이는 많이 못 클 줄 알면서 뿌리지 않았으니 잘못도 아니다. 미필적 고의에 가깝다.
“퇴비를 흙이 안 보이게 뿌려야 써”라는 말에는 귀가 다 닳았다. 헌데 이를 악물고 거름을 뿌려도 그렇게까지는 잘 안된다. 많이 뿌리질 못한다는 얘기다. 흙과 볕이 어울리고 적당히 영양을 공급해서 알맞은 크기의 작물을 수확하는 게 정상일 텐데, 무조건 밥 많이 먹여서 키운다고 좋을 성 싶지 않아서 그렇다. 나를 봐도 그렇다.
작물도 주인을 닮아 가는지 무는 대부분 작고 동그란 편이었다. 심지어 이파리 숯이 적은 것까지 꼭 닮았다. 실제로 그렇다면 서장훈이나 최홍만이 거기서 그러고 있을게 아니다. 그 사람들이 농사지면 고구마고 감자고 간에 해외토픽 감으로 쏟아질 테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김연경을 꼬셔서 들여 앉힐 용의도 있는데…
속은 메슥거렸고 아랫배는 부글거렸다. 전날 흡입한 술과 안주가 마침내 수정돼서 생명체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화장실을 갈까 말까 하다가 가스부터 분출시켰다. 천으로 된 의자를 뚫고 시원하게 내려갔던 가스는 히터의 열을 받아 익어서 다시 올라왔다. 냄새만으로 전날 안주와 술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철스님은 “학과 같이 고고한 영물은 자기 위장 크기의 7할 이상을 먹지 않는다”며 과식하고 소화제 먹는 걸 가장 미련한 짓이라고 하셨단다. 학이 되고 싶다거나 위장의 능력을 무시한 채 7할만 먹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식과 과음은 미련한 짓이 분명하다. 다음날이 괴롭다.
전날, 오랜만에 H동생이 저녁을 먹자고 전화했다. 궁금하거나 아쉬운 게 있을 때마다 전화하지만 제대로 술 한 잔 사준 적이 없어 잘 됐다 싶어 한 잔 하기로 했다. “요즘 머 허요? 일 읎지라?” 툭 던지는 인사말에 정곡을 찔렸다. 김장철도 지났고 남들은 슬슬 정리하면서 한가한 시간으로 접어드는 때다. “난 아직 할 일 많아. 무 정리해야지, 양파도 다시 심어야지, 고추밭 정리도 안 끝났지” 하는데 동생이 말을 잘랐다. “허이고~ 넘들이 들으믄 대농인갑다 허겄네요.” 그래서 남들 듣는 데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는 편이다.
중반전 쯤에 D동생이 합석했다. 같이 아는 사이라 연락을 넣었더니 기꺼이 달려왔다. “장사는 잘 되냐? 다 불황이라는데.” D는 씩 웃으며 답했다. “워쩌것대요.” 맞다. 어쩔 수 있나. 견디며 사는 거지.
이런 저런 얘기로 후반전을 달릴 즈음 D가 말했다. “형님은 이 정도믄 성공한 거 아니래요? 인자 자리 잡은 거지라.” 성공. 문득 의미가 헷갈렸다. “성공이 뭔데?” D는 반문을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형님 앞가림 하겄다, 형수님도 좋아하는 일 하시겄다, 선재도 잘 크겄다, 머가 걱정이래요.” 다시 물었다. “그게 뭐 성공이냐. 여기 H정도는 돼야 성공이지.”
내 생각에는 그랬다. H는 구례출신으로 대도시에서 자영업을 하다가 다시 내려와 아버님이 하시던 농사를 물려받아 규모와 수익 면에서 모범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그런 H생각은 달랐다. “형님, 나는 도시에 한 번 나갔다 돌아온 놈이요. 만약에 여기서 실패하믄 더 갈 데가 없지라. 긍게 죽기 살기로 하는 수 밖에요.” ‘고향’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오히려 그게 부담이라고 했다. H는 말을 이었다. “난 형님 농사를 존중해요. 돈 벌기는 힘들지만 형님이 선택한 방법대로 해 나가는 게 의미가 있으니께요. 부족헌 대로 알바도 허고 글도 씀시롱 살아가믄 되지만 우리는 농사밖에 없당게요.”
각자에게 성공의 의미는 다르다. 누구에게는 안정이 성공이고 누구에게는 끊임 없는 번창이 성공일 거다. 단순히 이사 온 것이 아니라 삶을 통째로 바꾸고자 내려왔고, 어느덧 이곳이 더 익숙해 졌다. 아직 안정적인 삶이라고 할 만큼 해 놓은 것도 없고, 실패라 할 만큼 잃은 것도 없다. 특기인 버티기로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자신 있다.
이제 귀농 7년 차에 접어든다. 미운 일곱 살이라고 했다. 대들고 떼를 부리고 억지 쓸 수 있는 건 그만큼 역풍에 견딜 자신이 생길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제 살만하다는 반증이다. 그럴 수 있을까? “못써!”라는 무서운 단정에 반기를 들거나 “그러는 거 아녀”라는 말에 대들기도 하고 말이다. 아직은 상상하기 힘들다.
무 손질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양은 적지만 개수가 많다 보니 손도 많이 갔다. 시래기를 편리하게 말릴 생각을 하다가 옷걸이를 사왔다. 거기에 잘라 낸 무청을 꼭꼭 눌러 끼우다 보니 시간에 비해 진척은 더뎠다. 비도 내리고 바깥 일도 못하니 어차피 농막에서 이 일을 마무리 해야 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은 일찍 찾아왔다. 이제 짧아질 밤이니 빛이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할 때다. 이제 또 하지를 향해 달음질 치겠지. 그렇게 뜨거운 여름은 금새 발등에 불을 내릴 거다. 좋은 말씀을 어기고 많이 먹고 살 것이며, 소화제와 북엇국에 의지하며 살아 갈 거다. 더 가지려는 자가 가난하다고 했으니 부자는 아니더라도 가난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 어찌 살아 왔냐고, 그냥 그렇게 살 거냐고, 어찌 살 거냐고 물으면 이리 대답할란다.
“워쩌것대요!” 크, 좋은 말이다.
이제 보여 주는 일기는 그만 쓸란다. 그 동안, 그나마 깨어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을 다시 소개 드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디 건강하시길 기도한다.
간전댁할머니
본명 강대윤(83). 본래 택호는 친정 마을 이름을 붙이지만 할머니는 간전면으로 시집가셨다가 다시 본 마을로 돌아오신 경우여서 시댁 지역명을 택호로 쓰시게 됐다. 마을이 아닌 면 단위 이름을 갖고 계신 만큼 그에 어울리는 지혜와 품을 지니신 분이다. 그렇게 따지면 아내는 ‘서울떡’으로 불리니 대한민국 최고의 인성을 보여야 마땅한데 왜 숨기고 사는지 모르겠다.
처음 내려왔을 때 할머니 연세가 펄펄 나는 78살이었는데, 이제는 꽤 많은 종류의 약을 드셔야 하는 80대 중반에 들어서신다. 그릇 뒹구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가까운 앞집 할머니였으나 우리가 이사를 하면서 매일 뵙지 못한다. 그래도 아직 아내의 ‘베프’임에 변함이 없고, 엄마이자 할머니이시다.
이장님과 오봉떡엄니
본명 박종규(79). 김정자(76). 부부관계. 귀농해서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신 ‘구례 부모’ 이다. 아버님은 귀농 당시 이장님이셨고 11년간 중책을 이행하신 후 재작년 후임에게 물려주셨다. 나에게는 영원한 이장님이시다. 지금도 사서삼경을 외우시고 컴퓨터, 특히 엑셀프로그램 등에 능통하신 ‘얼리어댑터’ 이시다.
어머니는 표정만으로도 ‘고생과 헌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전형적인 ‘엄마’이시다. 시골에서 4남매를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학에 진학시키고도 남들에게 자랑 한 번 하신 적 없다. 나이 50 넘은 자제분들을 아직도 “아가”라고 부르시며, 아무 때나 들르면 “밥 잡숫고 가”라며 붙잡으신다.
아직도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며 두 분의 “괜찮어”라는 말씀을 들어야 괜찮은 줄 알고 산다.
장씨아저씨
본명 장진환(70). 올해 노인회장을 맡으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워낙 건강하시고 활동적이셔서 ‘노인’이라는 단어가 아저씨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엄사-노고단 코스를 2시간 반 만에 오르고, 겨울에도 자전거를 즐기시는 청년 같은 느낌이 더 강한 분이다. 올 초 허리 수술을 받으신 후 회복 중이신데, 그럼에도 복대를 찬 채 비닐하우스에서 호박을 키우시느라 힘든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가끔 농막에서 봉지 커피와 함께 나누는 대화에서 큰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툭 던지고 가시는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귀농해서 아무 것도 모를 때, 아저씨 같은 멘토를 만나 “그렇게 하면 안돼” 보다 “쉽진 않겠지만 일단 해 봐”라는 말씀을 많이 들은 것은 행운이었다. 아저씨의 두툼한 입술만큼이나 두터운 신뢰를 주신 분이다.
D동생
본명 김득우(40). 단소를 사랑하고 논어와 맹자를 좋아하는 청년. 충북 괴산으로 자연농업 교육을 함께 받으러 간 것이 인연이 된 동생이다. 낙천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고하를 불문하고 자주 가르치려 드는 특징을 갖고 있다. 걱정이 있거나 우울할 때 만나면 단박에 해소해 주는 특기도 있다.
농사로 승부를 보려다가 일단 주춤하고 기름 업계에 뛰어들어 단박에 주유소를 경영하는 등 추진력과 활동적인 면에서는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읍내 어느 식당을 들어가든 꼭 아는 사람과 인사할 만큼 마당발의 소유자이다. 여전히 감 농사는 포기 안 하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발산하며 희망적인 궁리를 즐기며 산다. 절대 결혼하지 말라는 유부남 형님들의 진심 어린 조언을 무시하고 목하 열애 중이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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