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학교, 두발-복장 확인증 발급
선별적 허용으로 학생 자유 침해
운동화 신겠다는데 진단서 요구도
학칙 제-개정은 학교장 권한
당국 “시정 요구 안 지키면 그만”
경남 A중학교에 다니는 김모(15)양은 최근 머리카락 색이 옅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갈색 머리카락이 자연산임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염색이 허용되지 않는 학교 규정 탓에 두발검사 때마다 일일이 해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양은 4일 “교사가 머리 속을 들추고 뿌리색까지 살펴 본 뒤에야 (학교 규정 적용에서 예외를 허용하는) 확인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며 “검사 받는 게 싫어 아예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학생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학생인권조례’가 학교 현장에서 여전히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학교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두발과 복장의 자유를 억누르는 등 학생 인권을 침해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생인권조례는 인권 약자인 학생들을 보호하는 제도적 방안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지자 각 시도교육청이 ▦차별 받지 않을 권리 ▦종교와 표현의 자유 ▦복장과 두발의 자유 등의 내용을 담아 2010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는 엄격한 학칙을 완화하는 방편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확인증 발급은 두발ㆍ복장 자유의 권리를 억압하는 대표적 악습이다. 서울 B여고에는 학교가 지정한 구두만 신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운동화를 착용하기 위해선 발을 다쳤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뒤 ‘신발증’을 발급 받아야 한다. 이 학교에 다니는 이모(17)양은 “구두는 착용감이 좋지 않아 통증과 불편을 호소하는 학생들이 많은데도 학교에서는 운동화를 신으려면 무조건 진단서를 내라고 윽박지른다”고 토로했다. 바지를 입어야 하는 사정을 증명해야 ‘바지 확인증’을 끊어주는 여고도 있다. 서울 C여고 학생 김모(17)양은 “확인증이 있어야 바지 착용이 허락되다 보니 오히려 바지를 입은 친구들은 무슨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역추정을 당하는 등 낙인효과가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11월 더불어민주당 장인홍 서울시의원이 공개한 ‘학교규칙 점검 결과’를 보면 서울 중ㆍ고교 702곳 중 609곳(87.0%)이 학칙에 ‘두발 제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 속옷 양말 신발 등의 색상(61.0%)과 여학생 치마길이(58%)를 규제하는 학교도 많았다.
사정이 이런데도 교육 당국은 해당 학교를 제재하거나 시정을 요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조례를 강제할 권한이 없어서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현재의 학생인권조례는 시행령과 조례가 뒤섞여 있어 짜임새가 없는데다 학교들에 대한 지도ㆍ감독 권한이 적어 인권침해 신고를 받고 시정 지침을 내려 보내도 학교가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어려움을 표시했다. 2012년 3월부터는 학교장이 학칙을 제정ㆍ개정할 수 있도록 한 초ㆍ중등교육법 개정안이 시행돼 당국이 개입할 여지는 더 줄어들었다.
교육 관료들의 무사 안일주의도 학생인권조례가 정착되지 못한 이유로 꼽힌다. 서울의 경우 진보ㆍ보수 교육감을 번갈아 거치며 조례를 무력화시켰다 재시행하는 과정에서 방향성이 계속 달라졌다. 고유경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수석부회장은 “수장이 바뀌면 인권조례도 묻힐 게 뻔하다는 공직자들의 생각이 강해 괜히 학교 비위를 건드려 잡음을 일으키기보다 윗선 눈치를 보며 조례 시행을 흉내 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인권의 척도인 만큼 교육 당국이 보다 면밀한 대안을 마련해 조례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장을 지낸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도교육청이 인권조례 준수 여부에 따라 연구학교를 지정할 때 평점을 달리하는 등 사용 가능한 행정력을 써야 한다”며 “학생인권법을 만들어 조례 시행을 강제하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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