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시인 등 문화예술인 95명
광화문 농성장서 정부세종청사로
오늘 조윤선 장관 출근 저지 예고
“이런 일로 만나 안타깝지만”
“함께하게 돼 자랑스러워”
“표현의 자유, 의무이자 권리”
서울 기온이 영하 7도까지 떨어지는 등 깜짝 한파가 몰아 닥친 11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광장.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은 “이런 일로 만나게 돼 안타깝다”며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인사) 작성에 항의하러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가기 위해 모인 문화 예술인들이다. 출발에 앞서 가진 사전 집회에서 백기완(85) 통일문화연구소장은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박근혜 정부의 퇴행적 문화정책을 질타하며 “거짓말, 독재 정권을 뿌리 뽑기 위해 내려가는 것임을 명심하자”고 포효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짧은 사전 집회를 가진 이들은 십시일반 갹출해 마련한 ‘블랙리스트 버스’ 3대에 올라탔다. 거리 시인으로 불리는 송경동(50)씨 등 문화 예술인 95명뿐 아니라 기륭전자 노동자와 유성기업 노동자 등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광화문에서 천막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도 합세했다.
버스에서 마이크를 잡은 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인 맹문재(51) 시인은 “예술가들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권리”라며 “화가 나기도, 슬프기도 하지만 함께 하게 돼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권현영(51) 시인은 “예술가, 작가는 검게 칠할 수 없다”며 “이제는 짐승과 싸워 어떻게 이겨야 할지를 생각할 때”라며 의지를 다졌다.
탑승한 작가들은 대부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불이익을 당했다. 세월호 관련 시국선언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는 소설가 한창훈(53)씨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작가에게 주는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서 제외됐다”며 “이는 지원금으로 예술하는 사람들 목줄을 죄려는 비열한 일”이라며 정부 행태를 꼬집었다. 정치성 강한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리고 있는 연극 동인 혜화동 1번지 연출가 송경화(34)씨 역시 “정부의 블랙리스트 작성은 결국 예술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검열하는 일로 이어진다”며 “과거 독재정권은 국민에게 총을 들었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총으로 예술가들을 저격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견 예술가들은 30년 전 군사정권 때와 똑같은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며 개탄했다. 걸개그림 제작 등 민중미술 계열 판화가인 류연복(59)씨는 “1980년대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가 반체제 성향 예술인의 동향을 감시하고 불법적으로 연행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이런 탄압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오후 1시 30분 문체부 청사 앞에 도착한 이들은 검은 마스크와 가면을 쓰고 둘러 앉아 정권에 의해 입 막히고 행동을 제약당한 문화예술인의 현실을 고발하는 침묵 연좌시위를 벌였다. 지역 예술인과 대학생 등이 합류해 참가자는 25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저녁 문화제와 단합대회를 진행하고 노숙농성을 이어간 이들은 12일 오전 블랙리스트 작성 작업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조윤선 장관 등 문체부 인사의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일 계획이다.
세종=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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