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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 김 대리, 부장 앞에선 "자전거 공포증 있어요"

입력
2017.01.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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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조직 일심동체 요구하는

직장문화로부터 사생활 지키기

강제노역 경험하면 더 숨겨

일본영화 감상 취미 밝혔다가

번역에 해외업무 떠맡기도

"평생 직장 보장 않는 세태

무조건적 충성 사라져"

2030 직장인들이 개인과 조직의 일심동체를 요구하는 직장문화로부터 사생활 지키기에 나섰다. 게티이미지뱅크
2030 직장인들이 개인과 조직의 일심동체를 요구하는 직장문화로부터 사생활 지키기에 나섰다. 게티이미지뱅크

“박 대리는 낚시 한번도 안 해봤나?”

한 토목ㆍ건설업체 구매팀의 점심시간, 김모 부장의 질문에 박종민(32ㆍ가명) 대리의 대뇌에서 ‘직장생활 알고리즘’이 활성화한다. 박 대리는 망설임 없이 “전혀 없다”고 대답한 후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부장님, 근데 낚시는 무슨 재미로 하세요?”라며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사실 박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난 ‘낚시광’이다. ‘불금’(금요일밤)이면 그는 젊음의 거리인 홍대나 강남이 아닌 강화도, 거제도 등으로 1박2일 낚시 캠핑을 떠날 정도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낚알못’(낚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자처한다. 그는 “낚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내 낚시 동호회 소속인 김 부장이 낚시를 함께 가자고 할 것 같아 일부러 연기하고 있다”며 “내 삶의 유일한 낙을 직장으로부터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사회초년생 등 2030 직장인 가운데 두 개의 자아를 연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직장에선 취미, 특기, 가치관 등이 실제 자아와는 전혀 다른 직장용 자아를 소환하는 ‘듀얼(이중) 모드’를 발동했다 퇴근과 동시에 이를 해제하는 식이다. 이는 무보수 야근과 회식에 장외 친목까지 개인과 조직의 일심동체를 요구하는 직장 문화의 공습으로부터 최후의 보루인 사생활을 지키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2030 직장인이 다양한 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장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란 분석도 나온다.

우선 2030 직장인의 이중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발현되는 분야는 취미와 특기다. 한 이동통신사의 영업부서에 근무하는 4년차 직장인 김도현(31ㆍ가명)씨의 회사용 취미는 독서다. 직장에서 상사들이 “주말에 뭐하냐,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김씨는 독서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가 1년간 읽은 책은 ‘컬러링북’(색칠놀이 책)밖에 없다. 사실 김씨는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고 평균 100km(왕복)를 달리는 ‘자전거광’이다. 그럼에도 상사가 김씨에게 운동 겸 취미로 자전거를 권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자전거 공포증이 있다”고 말한다. 참고로 김씨는 어릴 때도 지금도 두 손 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다. 그는 “직장 상사가 같이 라이딩을 가자고 할 것 같아 처음부터 철벽 전략을 쓴다”고 전했다.

특히 과거 직장에서 ‘주특기’를 공개했다 강제노역 등 낭패를 본 적이 있는 2030들은 허물을 더욱 두텁게 한다. 매일 퇴근 후 일본 드라마와 일본 영화를 챙겨보고 J팝 음악과 함께 잠을 청하는 온라인 쇼핑업체 상품기획자(MD) 정민주(29ㆍ가명)씨는 원어민급 일본어 실력에도 회사에선 일본의 ‘일’자도 입밖에 내지 않는다. 정씨는 “전 직장에서 상사가 일본어 전공자를 찾길래 일본어 실력을 얘기했다 그 때부터 번역 등 일본 관련 업무까지 떠맡게 됐다”며 “애초에 이 회사에서 살아남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무보수 번역노동에 기존 업무까지 처리하느라 매일 야근만 했다”고 말했다. 한 국책은행에서 근무 중인 이상민(33ㆍ가명)씨는 중학교 때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선출’(선수출신)이나, 직장 상사가 축구실력을 물어보면 “제가 운동 신경이 없어서…”라고 답한다. 전 직장인 종합상사에서 선출 이력을 밝혔다가 사내 축구 동호회에 강제 소환돼 주말에 ‘축구 2시간→식사 겸 술자리 n시간 (n의 최소값=4)’의 혹독한 고역을 했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있기 때문이다.

직장 안과 밖에서 성격이 180도 달라지는 다중인격 유형도 있다. 직장 상사의 ‘평판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여행사 2년차 직장인 정승희(31ㆍ가명) 씨는 회사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묵언수행’에 돌입한다. 팀 회의나 보고 때를 제외하면 단답형 대답을 고수하며 과묵한 이미지를 피력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로 통하는 그의 모습과 180도 다르다. 그는 “가벼운 사람으로 비춰져 좋을 게 없을 것 같고 승진욕심도 별로 없다”며 “사내에서 ‘노잼’(재미 없음)으로 분류되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옷차림 등 외적 요소를 토대로 실제 성격을 숨기는 부류도 있다. 전자상거래 업체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전경미(28ㆍ가명)씨는 신데렐라 전략을 쓴다. 주말에는 하이힐을 기본 장착하고 형형색색의 옷을 소화하는 패션 피플이지만 월요일 오전부터 마법이 풀리면서 평일 5일 내내 ‘회색 후드티+청바지+운동화+패딩점퍼(겨울)’조합의 단벌숙녀로 되돌아간다. 전씨는 “회사에 화려한 옷을 입고 가고 패션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 괜히 상사들이 이상하게 평가할 것 같아서…”라고 전했다.

채용정보 검색엔진 ‘잡서치’가 지난해 초 직장인 76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직장 내 이중성’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급이 낮을수록 직장 안과 밖의 모습이 다른 이중성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직장 안과 밖의 모습이 ‘다르다’는 의견이 인턴 직급에서 38.5%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사원(30.4%) 대리(33.0%) 과장(22.4%) 관리자급(18.2%)이 그 뒤를 이었다.

이처럼 젊은 직장인들의 이중성 경향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직장 문화와 2030 성향 간의 ‘불일치’때문으로 풀이된다. 개인주의 색채가 짙은 2030들은 공적 영역(직장)과 사적 영역(사생활)을 철저하게 분리한다. 반면 우리나라 직장에서는 개인과 조직을 동일시하는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다. 이에 따라 2030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하게 감추는 방식으로 사생활이 침해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030세대는 공과 사에 명확하게 선을 그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2030 세대의 다양한 가치기준을 현재 우리나라 직장 사회가 포용하지 못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곽 교수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4050세대와 달리 2030세대는 가치관과 취미 등의 측면에서 개인별로 천차만별”이라며 “2030 입장에서는 4050 기준이 지배적인 직장에서 굳이 불이익을 감수하며 자신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노동시장 구조 변화도 직장 안과 밖이 다른 2030 세대를 잉태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관리자 직급이 입사했을 때는 회사가 기본적으로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삶을 책임졌고 이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는 개인과 조직을 동일시하고 충성하는 경향이 컸다”며 “그러나 지금처럼 ‘평생 직장’을 담보해줄 수 없는 극도로 불안정한 노동 환경 아래서는 굳이 회사에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잦은 야근과 회식 등 구시대적인 우리나라 직장문화도 2030 세대의 이러한 선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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