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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글쟁이 페달] 라이딩 중 찾아온 일생일대 위기

입력
2017.01.1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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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전거 탈 때 무척 조심하는 편이다. 라이딩 나가기 전 정해둔 절차에 따라 약 40여분에 걸쳐 장비 점검을 실시한다. 라이딩 도중 노면에 뭔가 미심쩍은 게 보인다 싶으면 멀찌감치 돌아간다. 내리막 코너에서는 절대 감속한다. 그래서인지 10년 자전거를 타며 그 흔한 타이어 펑크 한번 난 적이 없다.

이렇게 보신주의의 끝을 달려온 나의 라이딩 인생에도 위기는 있었다. 거금을 들여 풀 카본 로드바이크를 장만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 자전거만 봐도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워낙 부끄럼 많은 성격이라 동호회 활동은 부담스러웠다. 초기엔 거의 혼자 자전거를 탔다. 외롭지 않았냐고? 천만에. 너무나 즐거웠다. 탈 때마다 감동에 몸을 떨었다. ‘풀 카본 로드바이크라는 게 이렇게 잘나가는 자전거였구나!’ 뻥 좀 보태자면 페달이 발냄새만 맡아도 자전거가 앞으로 튀어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충만한 행복은 곧 무참히 깨지고 만다. 첫 위기는 장 트러블 때문이었다.

전날 술을 좀 과하게 마시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위급해질 줄은 몰랐다. 하반신을 옭죄는 빕숏, 배에 계속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이 승수효과적(乘數效果的)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하필 주변에 논밭뿐, 아무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빨리 화장실을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 그냥 밭에 내려가서 해결할까 하는 번민, 밑 닦을 종이 한 장 없다는 당혹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와중에 며칠 전 읽은 안타까운 사연이 생각났다. 화장실 앞에 고가의 자전거를 세워두고 볼일 보고 나왔더니 자전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 사연 주인공은 앞으로 화장실 갈 때는 자전거에 줄이라도 묶어 손에 쥐고 들어가야겠다고 적었더랬다. 읽을 당시 나는 ‘웬 줄? 차라리 잠깐 묶어두는 용도로 열쇠를 챙겨야지’라며 속으로 혀를 찼었다. 그래놓고 나는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단 화장실을 찾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줄, 노끈 같은 게 있는지도 찾아보자… 필사적인 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산책로 근처의 화장실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화장실 앞에는 마치 나를 위해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줄이 있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낡은 전선이었다) 자전거 핸들바 근처에 줄을 칭칭 감아 묶고 화장실 입구에 세웠다. 그리고 나머지 끝단을 쥐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근처에 제법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마 저 사람 뭐하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터라 괄약근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옆에서 누가 발만 세게 굴려도 찔끔 흘러내릴 판이다. 자, 이제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으면 된다. 마음이 편해지던 그 순간 깨달았다. 바지를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상의를 모두 벗어야 한다는 것을. 재킷을 벗고 저지까지 벗어야 바지를 내릴 수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입고 있는 건 그냥 바지가 아니라 빕숏, 멜빵바지이기 때문이다.

자전거에 줄까지 묶으며 난리를 쳤건만, 하마터면 마지막 단계에서 모든 걸 수포로 돌릴 뻔 했다. 그랬다면 그 자괴감은 랩핑된 그릇 위에 간짜장을 붓는 실수 따위엔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게다. 나체가 되어 변기에 앉아 깊이 반성했다.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과민성대장증후군 때문에 수능 언어영역을 망쳤던 나다. 이런 일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고, 대비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솔로 라이딩 때만큼은 철저히 장 트러블 대비를 하게 됐다.

라이딩을 하다 보면 별별 일을 다 겪게 된다. 그룹 라이딩의 경우 대부분의 사건 사고는 집단 차원에서 해결 가능하다. 장 트러블이 생겨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화장실 갈 때 자전거에 줄 따위 묶지 않아도 된다. 낙차, 기재고장 등 사고가 났을 때도 수습이 쉬워진다. 그날 내가 나체로 변기에 앉아 고민한 건, 정확히 말해서 장 트러블의 위험이라기보다는 솔로 라이딩의 위험이라 할 수 있다. 혼자 자전거 타다가 문제가 생기면 자칫 사태가 심각해진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만약 인적 드문 도로에서 라이딩을 하다 차에 치이거나 낙차로 부상을 당한다면? 스스로 구조연락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다치거나 정신을 잃는다면? 다행히 누군가 사고를 발견하고 나를 병원으로 이송했더라도 신원이나 가족 연락처, 병력 같은 것을 몰라 초기 대처를 제대로 못할 수도 있다. 사고시 휴대폰이 망가지거나 분실될 경우 신원 확인 자체가 어렵게 된다. 사고가 안 나는 게 최선이지만, 사람 일은 어찌될지 모르므로 대비해두는 일은 필요하다. 이를 고려했을 때 필수 준비물은 신원인식표(ID Tag)다. 여기엔 이름, 주소, 가족 연락처, 알러지, 병력을 기록해두는 게 보통이다. 팔찌처럼 만들어서 차기도 하고 지갑에 넣어두기도 한다. 이것만큼은 모든 자전거 라이더들이 보험 차원에서라도 지니고 다니는 게 어떨까 싶다.

신원인식표
신원인식표

관련해서 ‘아이스닷 크래쉬 센서(ICEdot crash sensor)’라는 제품은 흥미를 끈다. 휴대폰과 연동한 일종의 충격 센서인데 일정 정도 이상 충격을 감지하면 경보를 울리고, 만약 (사용자가 정신을 잃는 등의 이유로) 경보를 해제하지 않으면 미리 설정해둔 곳으로 응급연락이 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가격과 유지비가 비싼 게 흠이다.

아이스닷 크래쉬 센서는 헬멧에 달 수 있다.
아이스닷 크래쉬 센서는 헬멧에 달 수 있다.

사실 이런 것보다 자전거 안전에 대한 더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솔루션은 이미 나와 있다. 출고되는 모든 자동차에 자전거 및 보행자를 인식하고 경고하는 장치를 부착하는 것이다. 현재 기술 수준으로 충분히 실현가능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크게 관심 없어 보인다. 이 장치를 개발해 상용화한 유일한 자동차 회사는 스웨덴의 볼보 사였다.

보행자와 자전거를 구분해 인식하는 볼보의 시티 세이프티 시스템
보행자와 자전거를 구분해 인식하는 볼보의 시티 세이프티 시스템

만약 이런 장치가 보편화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치명적 교통사고가 자동차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일 게 분명하다. 길을 걷고 자전거를 타다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사고도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나 역시 장 트러블만 조심하면 될 테고 말이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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