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최근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역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씨측에 수백억원대 뇌물을 건넨 혐의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서 경영진을 잇따라 소환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오너인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뇌물죄 등의 혐의로 특검팀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지난 19일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1938년 그룹 창사 이래 처음으로 오너 구속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됐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특검팀이 이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를 의식한 듯 특검 대변인 이규철 특검보도 지난 20일 브리핑에서 “추후 상황에 따라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곧 삼성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각종 포털이나 사회관계형서비스(SNS)에서는 ‘유전무죄(有錢無罪)’운운하며 삼성과 이 부회장에 대한 비난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20일에는 이 부회장의 영장 기각 무효를 외치는 촛불집회까지 열렸다.
대두되는 반 삼성 분위기
경복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이 부회장은 1991년말 삼성전자 공채 32기로 입사한 뒤 유학을떠나 일본 게이오기주쿠대와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덕분에 그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나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 등 세계 정보기술(IT) 업계 거물들과 돈독한 인맥을 갖고 있다.
이후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복귀한 이 부회장은 본격적인 경영 수업에 들어가 최고고객책임자 겸 전무,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부사장, 사장을 거쳐 2012년 삼성전자 부회장에 올랐다. 3년 전인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그룹 경영을 챙긴 그는 전용기도 이용하지 않고 비서 없이 홀로 가방을 들고 해외 출장을 다니는 등 실용적인 경영 행보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는 경영권 강화와 주력 분야에 집중하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삼성테크윈 등 일부 계열사의 매각 등 새로운 모습의 삼성 그룹 정비에 주력했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 이후 이 부회장의 최대과제는‘국민 정서 돌리기’가 됐다. 재계 관계자는 “실적 등 그룹 내 문제도 중요하지만 삼성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 부회장의 가장 시급한 과제일 것”이라며 “이제 막 그룹 총수로 첫발을 뗀 이 부회장에게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당장 이 부회장이 꺼내 들 수 있는 카드는 지난달 국회에서 열렸던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국정조사특위 청문회 당시 약속한 부친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1조원대 사재 출연 후속 조치와 그룹의 미래전략실 폐지 등이다.
이 회장은 지난 2007년 10월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의 정관계 로비 의혹 및 비자금 조성 폭로와 관련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뒤 경영에서 물러나며 1조원대 사재 출연, 전략기획실 해체(현 미래전략실) 등을 공언했다. 이 부회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부친의 1조원대 사재 출연과 관련해 “어머니, 형제들과 의논해 결정할 시기가 오면 좋은 일에 쓰겠다”며 “부친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시기를 놓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해체 역시 이 부회장이 어떻게 정리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래전략실은 승마협회를 통한 최씨 지원의 몸통으로 지목되며 국회 청문회에서 집중 포화를 맞았다. 이 부회장도 “미래전략실에 대한 의혹과 부정적 시각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며 “미래전략실은 선대 회장께서 만들어 부친인 회장께서 유지해 왔지만 부정적 인식이 있으면 없애겠다”고 말했다.
삼성 내부에서는 그룹 차원의 종합적인 투자나 업무 조정 등을 감안해 미래전략실의 즉각 해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공언한 만큼 미룰수록 또 다시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검 위기로 제동걸린 지주사 전환
이렇게 되면 이후 이 부회장이 구상하는 삼성전자의 지주사 전환 등 그룹 경영에도 변화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지주사 전환은 이 부회장 등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와 안정적 경영권 확보를 위해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삼성전자를 지주사와 사업자회사로 인적 분할하면 지주사 주식만큼 사업자회사 주식도 새로 배정받게 돼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강화한다는 복안이다. 삼성 관계자도 “표면적으로 외국계 해지펀드에서 지주사 전환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지주사 전환은) 경영권 승계 작업의 첫걸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전했다.
문제는 특검 수사가 길어질 경우 지주사로 전환해도 이 부회장의 경영권 강화 실익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여야 정치권에서는 현재 상법 개정안을 국회의 발의한 상태인데, 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지주사 전환 후 배정받은 신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이 부회장으로서는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는 주식이나 마찬가지여서 지주사 전환의 실익이 없는 셈이다.
여기에 이 부회장으로서는 지주사 전환의 선결 과제인 중간금융지주사 도입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대기업들의 지주사 전환을 위해 중간금융지주사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소야대 국회를 주도하는 야당 측에서는 “삼성을 위한 법”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삼성생명을 중간금융지주사로 만들어 금융계열사를 지배하겠다는 삼성의 복안도 현재로서는 어떻게 될 지 앞날을 알 수 없다.
투명경영 강화가 해법
이런 상황에 특검 수사 때문에 해외에서 삼성그룹의 신인도가 떨어지는 문제도 이 부회장 으로서는 고민스러울 수 밖에 없다. 글로벌 브랜드로서 위상 하락도 문제이지만 미국 유럽 등에서 적용하는 해외부패방지법은 매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질적인 위험요소다. 해외부패방지법은 외국기업이 회계 부정이나 뇌물 등으로 법적 문제를 맞게 되면 자국에서도 함께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지난해 말 삼성전자 등기이사로 선임되며 명실공히 경영권 승계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이 부회장으로서는 산적한 과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갈 지가 관건이다. 경영전문가들은 국내외 신인도를 끌어 들이려면 사외이사제 강화 등 투명 경영에 우선 속도를 내야한다는 진단이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사외이사 제도를 강화해 이사회 위주의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한 투명경영에 집중해야 한다”며 “이번 일은 이 부회장 중심의 삼성이 새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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