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테흐스, 반기문 출마 반대’ 등 기승
이번 대선 정국에 공공의 적으로
美대선 흔들어 트럼프 당선 한몫도
‘속보, 유엔(UN)본부 반기문 출마 제동 움직임’. 새해 벽두부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후보 자격 논란을 일으킨 이 기사는 지난해 12월 27일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처음 노출됐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 ‘반기문 전 총장의 한국 대선출마가 유엔결의 위반’이라며 출마반대 의견을 밝혔다는 내용이다. 인터넷 언론인 유로저널이 이달 7일 이를 기사화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12일 라디오 방송에서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 정신과 협약 위반이라고 말했다”고 이를 전했다. 같은 날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트위터에 ‘구테흐스 신임 UN사무총장의 일갈’이라는 제목으로 해당 기사를 퍼날랐다. 하지만 구테흐스 총장은 이런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다 . 가짜 뉴스다. 미 대선을 뒤흔든 가짜 뉴스가 대선정국을 바라보는 국내에서도 벌써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가짜 뉴스를 만드는 순진한 그들
누가, 왜 이런 가짜 뉴스를 유포시키는 것일까. 한국일보 확인 결과 위 기사의 최초 게시자는 지방에서 활동하는 50대 문인 고모씨였다. 그는 “내가 올린 글이 맞다”고 시인했지만 가짜 뉴스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정보원이 전해준 내용”이라며 “기자들이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지 않아 지인에게 들은 내용을 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출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 큰 문제는 고씨의 글을 아무 확인도 없이 그대로 보도한 유로저널이다. 김훈 유로저널 편집장은 “기사형태로 된 블로그 글이 게시돼 있어 정상적인 기사로 알았다”고만 말했다. 엄연히 언론으로 등록된 매체마저 가짜 뉴스 양산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오보라기엔 황당한 일부 온라인 매체들의 뉴스는 심각한 수준이다. 글로벌디펜스뉴스의 ‘북한, 김진태 제거하라 지령 하달’, 투데이코리아의 ‘[단독]북한 간첩, 서울서 야당과 ‘대통령 탄핵’ 외쳤다’ 같은 기사는 구체적 출처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버젓이 뉴스로 유통됐다. 클릭 수가 곧 수익이 되는 언론시장에서 낚시 기사와 가짜 기사의 구분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는 핑계조차 없는 날조 뉴스도 많다. ‘영국 아르토리아 팬드래건 교수가 한국의 탄핵운동에 이적단체가 숨어있다고 지적했다’는 뉴스는 몇 가지 사항만 입력하면 손쉽게 가짜 뉴스를 만들 수 있는 페이크뉴스(Fake News) 앱으로 만들어 퍼졌다. 아르토리아 팬드래건은 게임 캐릭터 이름이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저명 정치학자로 속아넘어갔다. 최근 국내에서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이처럼 자동으로 기사를 만들어주는 앱과 사이트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짤방늬우스, 짤방제조기 같은 앱, 데일리파닥과 같은 사이트들이 이미 성행 중이다. 대선 정국이 앞당겨질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페이크뉴스 앱을 제작한 이는 카이스트 1학년생인 배재성(20)씨다. 그것도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든 것이다. 대단한 정치적 음모를 갖고 만든 게 아니라, 상상을 현실처럼 꾸며보자는 발랄한 IT 10대의 아이디어였다. 이 앱의 존재조차 잊고 있던 배씨는 지난 4일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정치 기사를 삭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깜짝 놀라 아예 앱을 삭제했다. 지금까지 이 앱을 다운로드 받은 이는 1만6,000명에 이르며, 앱 다운로드가 중지된 지금도 600여명이 사용 중이다.
가짜 뉴스 사이트 데일리파닥(Dailypadak.com)도 페이크뉴스와 비슷한 개념으로 2016년 만우절에 오픈했다. 이 사이트에는 ‘[단독]삼성물산, 패션부문 매각’ 같은 가짜 뉴스들이 올라와 있다. 제목과 사진을 클릭하면 만우절 장난 기사가 나오지만, 초기 섬네일 화면은 진짜 기사와 똑같다. 이런 기사가 포털에 유통될 경우 잠시라도 주식시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지난해 6월 29일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게시판에 올랐던 ‘[속보] 이건희 전 삼성 회장, 29일 오전에 사망’이라는 가짜 뉴스는 실제로 주식시장을 뒤흔들었다. 2014년 한 인터넷 언론이 이 전 회장이 사망했다고 잘못 보도한 기사에 사망 날짜와 보도일자를 바꿔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합성해 퍼트린 것이었다. 이 가짜 뉴스는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오후 3시 엠바고를 걸고 삼성이 곧 발표한다’는 내용까지 있어 언론도 분주히 확인에 나섰다. 이날 삼성그룹주 16개 종목 장중 시가총액은 309조 296억원까지 급등했다. 시총 최저치가 297조1,691억원이었으니 가짜 뉴스 하나에 12조원가량이 출렁인 것이다.
경찰 수사로 밝혀진 이 가짜 뉴스의 제작자는 일베 회원으로 당시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최모씨였다. 그의 동기 역시 단순했다. “추천을 받아 인기글로 등록되면 관심을 받을 수 있어 그랬다”고 최씨는 경찰에 진술했다.
퍼질수록 진실이 되는 가짜 뉴스
‘주목받고 싶어서’ ‘진짜일 줄 믿고서’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서’ 등 가짜 뉴스를 만든 동기는, 그 정치ㆍ경제적 파장에 비하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대체로 순진한 동기에서 만들어진 가짜 뉴스는 그러나 진짜로 믿고 싶은 이들에게 널리 퍼지고, 확산될수록 진짜 뉴스로서의 힘을 얻는다.
통상 트위터 팔로워 중 실제로 정보가 전달되는 비율이 15%인 것을 감안하면 위에 언급된 반 전 총장 기사는 정 전 의원 트위터(팔로워 33만4,000명)를 통해서만 약 5만명에 노출된 것으로 계산된다. 다른 경로를 모두 합쳐 수십만명이 이를 읽고 상당수가 진짜로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 전 총장은 현재 정치판에서 가짜 뉴스의 가장 큰 희생자로 꼽히는데, 최근 15건 중 7건이 잘못된 팩트이거나 편집된 사진에 의한 정보였다.
미 대선기간 동안 만들어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발표했다’는 가짜 뉴스는 페이스북에서 96만건이 공유ㆍ조회되거나 좋아요 반응을 얻는 등 진짜 뉴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버즈피드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는 도리어 가짜 뉴스의 덕을 봤다.
파장이 커져 주류 언론이 검증에 나서면 차라리 낫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트위터 등 지인 네트워크로 유통되는 가짜 뉴스는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할 도리도 없이 반복 전달되며 모호한 정체성을 확보한다. 일부는 이런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일부는 ‘다 사실은 아니어도 얼마간 이유가 있으니 이렇게 돌겠지’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데일리파닥 운영자 이모(29)씨는 “사이트에 올라오는 가짜 뉴스 중 30%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로, 60%는 카카오톡 같은 모바일 메신저로 공유된다”고 말했다.
이런 폐쇄형 경로를 통한 가짜 정보 노출은 50, 60대도 예외가 아니다. 60대의 한 대학 교수는 “고교 동창들끼리 만든 카톡방에 지난해 말부터 가짜 뉴스 글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공유된다”며 “우리 세대는 기본적으로 기사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 자기 성향에 맞는 내용은 더 적극적으로 유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선의 또 다른 적 어떻게 대처할까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11월 가짜 뉴스 등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 내용의 예비 후보 공격에 대한 신고를 받기 위해 ‘유언비어 신고센터’를 발족해 지금까지 4,400여 건을 접수했다. 9월 총선을 앞둔 독일에서는 페이스북이 가짜 뉴스를 24시간 이내에 처리하지 않으면 최대 50만 유로(6억 3,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가짜 뉴스를 감별하는 백신 연구를 시작했고, 팩트체킹 단체인 ‘풀팩트(Full Fact)’는 뉴스를 검색하면 진위 여부를 판단해주는 모바일 앱을 개발하기로 했다.
과거 대선 투표일 새벽 거리에는 충격적 내용을 폭로하는 전단지들이 뿌려지곤 했다. 지난 대선은 국가정보원의 댓글 개입으로 얼룩졌다. 이번 대선의 또 다른 적은 분명 가짜 뉴스가 될 터다. 급박하게 몰아닥친 대선 정국과 IT강국의 토양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라난 가짜 뉴스들을 과연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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