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문, 문죄인, 이죄명, 박원숭….
대선 주자들의 디지털 멸칭(蔑稱)이 컴퓨터 화면에 올라와 있다. 호명이 이러할진대 내용이 우호적일 리 만무하다. ‘무자격자 방귀문’ ‘거짓말만 치는 문죄인’ ‘이죄명은 금수저’ ‘철면피 박원숭’ 등 이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발언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23일 오후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범죄대응센터. 11명의 ‘비방ㆍ흑색선전 전담 TF팀’ 직원들이 가짜 뉴스의 유포를 막기 위해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대선 대비 체제에 들어갔다고도, 안 들어갔다고도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시국, 선관위는 이례적으로 전국 17개 시ㆍ도에 182명 규모의 단속팀을 특별 편성, 2일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킨 핵심 요인 중 하나가 가짜 뉴스였다는 소식이 태평양 건너에서 날아들면서, 벼락처럼 들이닥칠 한국 대선에도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선관위 “가짜뉴스를 찾아라”
후보자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공직선거법 제250조)와 비방ㆍ흑색선전 행위(251조)를 걸러내기 위해 선관위 TF팀은 자동검색시스템에 200개의 키워드를 넣고 SNS와 포털사이트,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등을 뒤진다. 200개 키워드에는 선거, 선관위 같은 일반명사부터 광범위한 출마 예상자들의 이름과 별칭이 포함돼 있다. 선거법 개정으로 지역 비하 발언도 모니터링 대상에 포함돼 홍어, 과메기, 개상도 등도 걸러진다. 사이버선거범죄대응센터의 정윤태 기획운영팀장은 “미국 대선에서 보듯 가짜 뉴스는 선거 판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며 “정확한 정보를 왜곡하고 곡해하는 가짜 뉴스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찌라시와 메모의 형태로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주로 유통되던 ‘허위사실’은 언론기사의 외피를 쓰고 보다 정교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기성 언론사의 제호와 헤드라인, 기사폰트를 그대로 흉내내 어엿한 정식 기사처럼 보이게 만들어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웹사이트 덕분이다. 선관위의 협조요청으로 지난주 가짜 뉴스 제작 앱 페이크뉴스가 삭제됐고, 웹사이트 데일리파닥은 선거 관련 게시물은 업로드를 하지 못하게 필터링 조치가 이뤄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짜 뉴스를 제작할 수 있는 앱들은 남아 있다.
외신 선호하는 한국형 가짜뉴스
외국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사회의 폐부를 찌르듯, 한국의 가짜뉴스는 외신 보도를 인용한 기사 포맷을 주로 흉내낸다. “CNN이 ○○○이라고 보도했다” “영국 정치학자 ○○이 ○○○이라고 말했다” 같은 식이다. 어려운 외국어 이름은 카니예 웨스트 같은 힙합 가수나 게임 캐릭터 이름이지만, 읽는 이의 사대주의적 사고 속에서는 ‘그런 유명인이 있나 보다’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탄핵정국에서 널리 퍼졌던 가짜뉴스 중에는 기사 후반부가 비틀즈의 노래 ‘예스터데이’ 가사였던 것도 있었다.
미 대선에서 실감한 가짜 뉴스의 파급력은 실로 엄청나다.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가 미 대선 전 3개월간 페이스북에서 가장 흥행한 주류 언론의 뉴스와 가짜 뉴스 20개를 비교한 결과 진짜 뉴스에 달린 댓글과 좋아요, 공유를 합친 수치(참여율)가 730만건이었던 데 반해 가짜 뉴스는 870만건으로 20%나 높았다. 가장 흥행한 가짜 뉴스 20개 중 17개가 트럼프 후보에게 유리한 기사였는데, 이런 가짜 뉴스들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CNN 같은 전통의 유력매체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가짜 뉴스로 돈 버는 ‘디지털 골드러시’
트럼프에 편향된 가짜 뉴스를 가장 많이 쏟아냈던 곳 중 하나는 뜻밖에도 마케도니아의 소도시 벨레스였다.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10대 청소년들이 가짜 뉴스를 마구 찍어내며 막대한 광고수익을 올린 것이다. 처음에는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 기사를 모두 내보냈지만, 미친 듯이 클릭이 쏟아지는 건 트럼프 뉴스였다. 고란이라는 이름의 19세 청년은 미국 우익 사이트를 복붙(복사하기+붙이기)해 만든 가짜 뉴스들로 월 평균 급여가 350유로인 마케도니아에서 월 1,800유로를 벌었다며 BBC와의 인터뷰에서 뻐겼다. “사실이든 아니든 누가 신경 쓰나요? 미국인들이 어떻게 투표하든 상관 없어요.” BBC는 월 수천 유로를 번 청소년들이 산 새 차와 값비싼 패션용품들로 거리 풍경까지 달라졌다며 이를 ‘디지털 골드러시’라고 명명했다. 글로벌 시대에는 한 국가의 선거가 그 국가만의 사건이 아닌 것이다.
“한국은 북한과 중국에서 가짜 뉴스를 생산해낼 가능성이 높죠. 지금도 대부분의 인터넷, 전화 사기가 이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잖아요.” 국회입법조사처 과학방송통신팀장인 김유향 박사(정치학)는 “(미 대선처럼) 가짜 뉴스가 손쉬운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있어 대선이 상업적 호재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가짜 뉴스가 특정 사이트를 선거 직전에 급조해 많은 트래픽을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유통된 것과 달리 한국은 SNS를 통한 유통이 아직까지는 더 강한 편이다. 돈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가짜 뉴스를 유포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명예훼손이나 선거법 위반에 걸리지 않도록 카톡이나 문자메시지 같은 폐쇄형 SNS 위주로 가짜 뉴스가 유통될 가능성이 높아요. 은밀한 만큼 단속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영향력은 더 강력하죠. 결국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균형 있게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가짜뉴스의 함정(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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