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2.2
95세의 버트런드 러셀은 자서전(1967~69년 출간,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프롤로그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나는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 그 첫째 이유는 사랑이 희열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단한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남은 여생을 모두 바쳐도 좋으리라 종종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이 외로움- 이 세상 언저리에서, 저 깊고 깊은 차가운 무생명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그 지독한 외로움-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려온 천국의 모습이 사랑의 결합 속에 있음을, 그것도 신비롭게 축소된 형태로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한 것이며, 비록 인간의 삶에서 찾기엔 너무 훌륭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결국 그것을 찾아냈다.”
일전에 본 스탕달과 달리, 그는 4번의 결혼(3번의 이혼)을 포함, 여러 다채롭고 격정적인 연애를 경험했다. 그 연애들 사이사이 공백기를 그는, 노벨 문학상(1950) 작가의 저 실감나는 외로움의 묘사에서 엿보이듯, 힘겨워했다. 물론 그 고통의 시간은 대개 그리 길지 않았고, 그는 외로움에 앙갚음하듯 뜨겁게 사랑했다. 뿌리가 휘그당의 처음에 닿아 있는 자유주의 전통의 백작가 차남으로 태어나 근대 100년을 거의 채워 사는 동안, 수학자로, 철학자로, 역사가로, 그리고 반전ㆍ반핵 평화운동가로 인류 지성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그였다. 초년의 스승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의 첫 영역으로 꼽았던 내면적 의식의 자유, 즉 양심과 생각과 감정과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그는 생애 내내 실천했다.
그런 그가 생의 말년 자서전의 첫 줄을 저렇게 시작한 것은, 사랑에 대한 사랑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서전은 스탕달의 연애론보다 훨씬 알찬 연애론이기도 하다. 그건 이성이 경험을 통해 감성과 결합함으로써 빚어낸, 좌절과 성취의 고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70년 2월 2일 98세로 별세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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