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생활이 가져다 주는 혜택 중에 하나는 자연을 관찰하는 즐거움이다. 마당 앞에 멀리 웅장하게 서 있는 산은 계절을 좇아 적절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지금은 하얀 눈이 옅은 고동색 침엽수 사이에 듬성듬성 뿌려져 있다. 저 산은 얼마나 저기 서 있었을까? 내가 앞마당에서 관조하는 산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수십억 년 전부터 그 자리를 잡고 앉아있지 않았을까? 산은 거센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쳐도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단지 적당하게 물을 머금고 자신의 몸에 둥지를 튼 나무, 꽃, 새, 곤충, 그리고 들짐승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자신의 몸에서 물을 졸졸 내어 그들의 목을 축인다. 물론 산 아래 살고 있는 인간에게도 생수를 공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무리 올라 다녀 길을 내고 나무를 베고 바위 위에 낙서를 해도, 오히려 그들에게 튼튼한 심장과 다리로 환대하고 인내를 선물한다. 산은 천둥번개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고 산에 거주하는 모든 생물을 사랑으로 보호한다. 산의 뿌리는 끝을 알 수 없는 지구 중심을 정확하게 향하고 있다. 자신의 몸은 계곡으로 움푹 패여 안개로 둘렀으며, 자신의 몸은 안개로 휘 감았지만 머리는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의연하게 앉아있다. 산은 침묵이다. 산은 경쟁하지 않는다. 항상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묵묵히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기에 산은 강하고 위대하다.
중국 철학자 노자는 강하고 위대한 인간을 ‘도덕경’ 33장에서 말한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지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위대하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우리는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더 많은 재산, 권력, 그리고 명예를 획득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강한 사람, 혹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행복의 기준이 나에게 달려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경도되어 있다. 그는 무한경쟁 안에서 항상 갈급하고 불안하다. 노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을 말한다. 그는 자신을 정복한 사람으로 ‘강한 사람’ 혹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사람은 자신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나의 포부가 얼마나 높은지, 나의 말이 얼마나 친절한지, 나의 행동이 얼마나 연민으로 가득 차 있는지. 위대한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절제’(節制)다.
절제 하면 떠오르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 있다. 히폴리투스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 비극 시인 아우리피테스는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아테네 시민에게 절제라는 가치를 공감시키고 싶었다. 대중선동가가 판치는 아테네 도시가 정교한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전설로 내려오는 신화를 근거로 ‘히폴리투스’라는 비극을 썼다. 히폴리투스는 테세우스 신과 안티오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다. 히폴리투스는 사냥의 여신이며 절제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숭배하고 스스로 ‘절제’의 삶을 산다.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그런 삶을 사는 히폴리투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음모를 꾸민다. 아프로디테는 그의 계모인 파이드라를 부추겨 히폴리투스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파이드라가 히폴리투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자, 히폴리투스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거절 당한 파이드라는 자살을 하면서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는 노트를 남긴다. 테세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히폴리투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그는 히폴리투스가 타고 가는 말들을 공포에 빠뜨린다. 히폴리투스는 전차에서 떨어진 후, 달리는 말에 깔려 죽음을 당한다. 아우리피테스는 이 비극에서 욕망을 상징하는 파이드라와 절제를 상징하는 히폴리투스를 단순 대비시키지 않는다. 그는 ‘절제’하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드문지 당시 아테네 시민들에게 보여주었다.
‘절제’라는 고대 그리스 단어는 ‘소프로쉬네’(sophrosyne)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여 단순히 ‘절제’로 번역하기 힘들다. ‘소프로쉬네’는 중용을 수련하는 개인에게서 발견되는 품격이다. 그리스어로 ‘소프로’가 ‘지혜’이며, ‘쉬네’가 ‘적절하게 엮다; 배열하다’라는 의미가 있어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적절한 실천하여 스스로에게 쌓이는 내공’이라고 할 수 있다. ‘소프로쉬네’는 그리스 델피 신전에 새겨진 두 경구인 ‘네 자신을 알라!’와 ‘무리하지 말라!’를 한 단어로 표현한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혐오한 인물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지 몰라 생기는 건방지고 무례하고 오만한 사람이다. 소프로쉬네를 몸에 수련한 사람은 겸허하고 배려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절제’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템퍼런스’(temperance)에도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절제’란 ‘적절한 순간과 시간(tempus)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다.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은 단순히 어떤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삼가는 소극적인 인간이 아니다. 절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대 절명의 임무를 목숨을 걸고 적절한 시간에 실천하는 숭고한 사람이다. 마치 고개를 하늘로 향해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는 산처럼. 우리 문화, 특히 정치와 미디어에 ‘절제’가 상실된 지 오래다. 무례하고 오만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나침반이다. 정치와 정부는 개개인의 거울이다. 내가 꿈꾸는 이상은 무엇인가? 나는 산과 같은가? 나는 절제를 실천하고 있는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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