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보조출연 일한 두 자매
성폭행 피해 수사받다 언니 자살
동생도 “원한 풀어달라” 목숨 끊어
어머니 홀로 소송ㆍ1인 시위…
분투하다 명예훼손 고소 당해
법원 “성폭행 사실 가능성” 무죄
13년 참척 아픔에 작은 위로
“피고인과 두 딸이 겪어야 했던 길고도 모진 고통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과와 간곡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
지난 9일 서울남부지법 형사10단독 정욱도 판사가 10페이지 가량의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빌딩 앞 도로에서 “내 두 딸의 영혼이 하늘을 맴돌고 있다”는 내용의 1인 시위를 하다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 장모씨의 유·무죄를 결정 짓는 자리. 정 판사는 2페이지에 달하는 ‘부언(附言)’이 담긴 이례적인 ‘반성의 판결문’을 장씨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2009년 8월 28일 한 여성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18층짜리 빌딩에서 떨어져 숨졌다. 한 때 영화와 드라마 보조출연자로 일했던 A(당시 34세)씨. 그는 유서에 ‘날 단단히 갖고 놀았다. 더 이상 살아 뭐 하겠니’라고 썼다. 6일이 지난 9월 3일. 경기 안양시 한 건물 화단에서 또 다른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A씨 동생이었다. 동생은 ‘언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딸들의 잇따른 죽음에 충격을 받은 자매의 아버지도 두 달 후 뇌출혈로 사망했다. 한 가족이 그렇게 붕괴했다.
2004년 A씨 자매가 보조출연자 일을 한 게 비극의 씨앗이 됐다. A씨에게 일을 소개한 건 동생이었다. A씨는 3개월간 방송기획사 관계자 12명에게 성폭행 및 성추행을 당했다며, 정신적 불안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 해 말 이들 12명을 수사기관에 고소했다.
A씨의 심신은 수사 과정에서 더 피폐해졌다.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는 가해자들과 수십 번 대질심문을 반복하면서 치욕감과 모멸감 등을 호소했다. 결국 2006년 A씨는 고소를 취하했다. 당시 강간 및 강제추행은 친고죄였다. 법원은 12명 전원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홀로 남은 어머니 장씨는 2014년 12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다. 마지막 안간힘이었지만, 결과는 패소였다. 민법상 소멸시효인 3년이 지났다는 이유였다. 성폭행 발생부터 9년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장씨는 해당 기획사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그들은 장씨를 ‘허위의 사실로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는 이유로 고소했고, 검찰은 장씨를 재판에 넘겼다.
정 판사는 장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기록을 종합하면 (성폭행 등) 형사고소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 성관계가 인정되는 4명과의 관계는 비정상적인 성관계”라는 점도 지적했다.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에, 또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형·민사상 책임을 지우지 않았을 뿐, 성폭행이 없었다는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 판사는 “이에 법원은 공권력의 한 부분으로서 공권력의 총체적 실패를 자책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공권력이 A씨에게 가해졌을지 모를 폭력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지도,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장씨가 치유 받을 기회를 주지도 못한 사실은 분명하다”며 “공권력이 자신의 부끄러운 실패를 외면한 채 그 실패에서 비롯된 어머니의 절망적 몸부림을 단죄하는 것은 공권력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란 말도 남겼다.
정 판사는 끝으로 “이 판결이 참척(慘慽·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사망)의 아픔 속에 살아가는 피고인의 여생에 잠시나마 위안이 되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두 자매의 안식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13년 동안 앓았을 이들 가족의 아픔에 대한 위로였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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