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ㆍ창극ㆍ발레 등 여러 분야서
정구호ㆍ김무홍 등 이미 참여
국내 1세대 디자이너 진태옥도
50년 만에 첫 연극 의상 도전
“기존 의상과 달라 신선” 반응 속
의상 불편ㆍ제작비 상승 우려도
“런웨이에서는 디자이너인 나를 표현하고 연극무대에서는 배우의 캐릭터, 작품의 성격을 표현한다는 것만 다를 뿐 런웨이와 연극은 동일한 부분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 진태옥(83)은 디자이너 경력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연극 의상에 도전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진 디자이너는 24일부터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는 ‘메디아’의 의상을 맡았다. 최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처절한 복수를 감행하는 주인공 메디아의 극단적인 면을 의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들려줬다. “암흑과 같은 고통과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검정 벨벳 소재를, 메디아가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식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힘없는 붉은색 저지 소재를 택했어요.”
연극 무용 등 무대 공연의상에 유명 패션디자이너들의 손길이 닿고 있다. 공연을 잘 이해하는 공연의상 전문디자이너들이 의상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엔 신선한 시각과 표현을 담아내기 위해 패션디자이너와 손잡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립극단에 따르면 진태옥 디자이너와 ‘메디아’의 인연은 지난해 연극 ‘갈매기’부터 시작됐다. ‘갈매기’의 포스터에서 배우 이혜영이 입고 있는 드레스가 진 디자이너의 의상이다. 당시 포스터 만으로도 의상이 작품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이 나오자 ‘메디아’에서는 아예 진 디자이너에게 무대 의상까지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게 됐다. 국립극단 관계자는 “진 디자이너가 극의 분위기를 잘 살려줄 거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 디자이너도 “극본을 15번 읽었다”며 “메디아 역은 피팅만 세 번을 거쳤고,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분량까지 계산하느라 애를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2015년 초연된 후 3년 연속 매진행렬을 이어 온 국립무용단의 ‘향연’ 의상은 패션디자이너 정구호 작품이다. 12개 한국 전통춤을 4막에 담아 ‘한국무용 종합선물세트’로 불리는 ‘향연’은 전통무용 의상으로 흔히 상상되던 ‘오방색’에서 벗어났다. 1막에서 무채색으로 시작해 노랑, 초록, 파랑 등 색을 하나씩 더해 한국무용을 더욱 감각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구호 디자이너는 2013년 ‘단’ ‘묵향’에 이어 ‘향연’까지 국립무용단 의상은 물론 무대디자인과 연출까지 맡았다. 2015년에는 국립무용단 작품 ‘적’에 패션브랜드 ‘푸시버튼’의 박승건 디자이너가 참여했다.
패션디자이너들의 의상은 이전 시대를 나타내는 작품에 현대적 감각을 덧입히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지난해 국립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트로이의 여인들’은 기존에 접했던 창극 의상과 달라 신선했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온 이야기를 판소리를 토대로 한 창극으로 풀어냈지만 김무홍 패션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의상은 오늘날 패션쇼에 등장할 법한 모습이었다. 국립극장 관계자는 “연출가가 생각한 주요 콘셉트가 ‘단순함 속에서 판소리의 깊이를 끌어낸다’ 였는데 김 디자이너의 특징 자체가 단순하면서도 전위적이라는 점”이라며 “김 디자이너의 기존 의상을 그대로 가져와도 연출가의 의도를 표현해 낼 정도로 딱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의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창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공연 의상의 특징이 뚜렷해 패션디자이너와 조우하는 경우가 적은 발레도 예외가 아니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강효형의 안무로 5월 무대에 오르는 ‘허난설헌-수월경화’는 패션디자이너 정윤미와 협업을 검토 중이다. 국내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작품의 경우 패션디자이너가 한복의 느낌을 살리기도 한다. ‘춘향전’을 바탕으로 한 국립발레단의 ‘사랑의 시련’에는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의 의상이 포함됐고, 유니버설발레단의 ‘춘향’은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딸 이정우 디자이너가 의상을 맡았다. 유니버설발레단 관계자는 “발레복 특성상 한복 소재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디자인 면에서 반응이 좋았다”며 “한국적 특색이 드러나다 보니 외국 공연에서도 호응이 컸다”고 말했다.
공연의상만의 특징이 있는 만큼 패션디자이너들의 의상이 불편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의상도 무대예술의 한 부분”이라며 “모든 객석에서 의상이 눈에 띄고, 마이크를 숨기고 배우들의 동선을 잘 이해하는 공연디자이너에게만 의상을 맡긴다”고 말했다.
정구호 디자이너가 만든 국립무용단 의상은 한복치마가 기존 의상보다 둥글고 풍성하다는 특징이 있다. 안 쪽에 천 조각을 여러 겹 덧붙여 라인을 만든 탓에 기존 무용복보다는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무용단 관계자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전과 달라 적응이 필요했던 정도였다”며 “적응 후에는 의상이 아름답고 한국 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무용수들도 만족해했다”고 말했다.
유명 패션디자이너가 작품에 참여하면 제작비가 더 상승하는 건 아닐까? 공연계 관계자들은 “특별히 패션디자이너라는 이유로 예산이 급격히 느는 건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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