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장인 이재호(29ㆍ가명)씨는 신입사원이던 지난해 초 부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혼난 기억이 생생하다. 다른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 편하도록 일부러 안쪽 구석에 자리잡았는데, 이 모습을 본 한 상사가 그에게‘상석도 구분 못한다’며 핀잔을 준 것. 알고 보니 이씨가 서 있던 구석은 상석이고, 신입이나 어린 나이의 사람들은 ‘말석’인 문 앞 조작버튼 앞에서 ‘안내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씨는 ‘같이 타는 사람의 선호에 따라 상석도 바뀌어야 하지 않나’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자는 생각에 그날 이후로 매번 문 앞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2. 4년 차 직장인 김지희(30ㆍ가명)씨 역시 입사 초반 직장예절 문제로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고객을 만나러 간 자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위해 밝게 웃으며 고객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는데 되려 상사의 지적을 받았다. 손윗사람에게는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손을 내밀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통용되는 매너라는 말에 납득하긴 했지만, 김씨는 기존 고정관념이 확 깨진 그날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고 했다.
회사도 신입도, ‘직장예절’ 위해 고군분투 중
금성에서 화성으로 출근한 기분이다. 늘 타던 엘리베이터에 상석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솔선수범이 미덕인 줄 알았건만 손은 먼저 내밀지 말라고 하니, 생소한 직장예절 앞에서 신입사원들은 혼란에 빠진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져 자동차 상석이나 명함 교환 매너를 외우는 직장인들도 여럿이다.
기업들 역시 신입사원 예절 교육에 공들이고 있다. 어렵게 뽑은 신입들이 조직문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게 되면 장기적으로 회사에 부담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306개 기업의 1년 미만 신입사원 퇴사율은 27.7%였고, 이들 중 49.1%가 조직 및 직무 적응이 어려워 퇴사하게 됐다고 밝혔다.
때문에 지난해 LG그룹이 신입사원 교육 프로그램에 ‘직장예절’을 신설해 인사법과 상석 구분법, 이메일 작성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등 각 기업은 낮은 연차 사원들의 매너를 세세하게 챙기는 중이다. 2015년부터 공공기관 및 공기업 채용절차에 도입되기 시작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역시 직업윤리 파트에 직장예절이라는 세부 주제를 두고 인사예절, 명함교환예절, 전화 예절 등을 다루고 있다.
그 예절, 누구 맘대로 정한 거지?
예절은 사회생활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방지하는 완충제다. 때문에 긴밀한 조직생활로 영위되는 기업 문화에서 직장예절을 유독 중시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일부 예절은 예의를 넘어 직원들의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을 강요한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술 예절이다. 대기업 A사의 신입사원 직장예절 교육에는 ‘술을 못 마셔도 상사가 주는 첫 잔은 받아 마셔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지난해 교육을 받은 박유진(29ㆍ가명)씨는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질문했는데 강사는 ‘못 마시는 걸 티 내지 않고 마시되 이왕이면 주량을 늘려라’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레르기성 체질 등 건강상 이유로 술을 마시지 못해도 일단 윗사람 기분 상하지 않게 가급적 마시라는 요구는 구시대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신입사원에 복종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공기업 B사의 신입사원 교육에선 ‘직장인은 며느리와 같다’는 내용이 나왔다. 강사는 “며느리가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모르는 척 시어머니에게 물어보면 귀엽고 살갑다”며 “사측이나 상사의 의견과 반하더라도 우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였다고 한다. 당시 교육을 받았던 이상희(29ㆍ가명)씨는 “아무리 직원이 ‘을’이라지만 신입사원에게 권장하는 태도가 너무 굴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래도 지켜야 할까?
‘합리적’ 직장생활을 위해 비합리적 관습을 지켜야 할까? 도대체 이런 관습들은 누가 만든 것일까?
대기업 신입사원 교육 전문가인 이준의 한국팔로워십센터 대표는 조직생활 예절들은 실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 대표는 “기업마다 내용이 다르지만 신입사원 직장예절 교육 내용은 각 기업 임원들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사회초년생들이 함께 일하는 분들은 평가주체인 40대, 고용 주체인 50~60대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공존할 수 있는 매너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조직 내 상석과 말석을 구분하는 권위적인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수평적 소통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혜숙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는 “직급이나 나이에 따른 예절을 과도하게 강조한다면 아랫사람이 좋은 의견을 말해도 중요하게 들리지 않는 부작용이 반복될 것”이라며 “일반 상식 선에서 예의를 지킨다면 예절과 관습은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납득하고 선택하자
예절이니까 무조건 지키라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지시하면 무조건 따르라는 1970년대의 예절은 ‘선생님의 지시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경험을 겪은 21세기 사람들에겐 당연하지 않다. 어떤 관습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시대와 그 관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신호일 수 있다.
전문가들 또한 예절을 지키더라도 타당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서우경 한국HRD교육센터 전략연구소장은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기존에 정해진 예절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기성세대에겐 ‘출근시 화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매너로 여겨졌지만, 인권의식이 달라진 20~30대에겐 ‘왜 화장을 해야 전문가처럼 보이나’ ‘왜 여자만 화장을 해야 하나’ 등의 질문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 소장은 “사회초년생들의 의문을 누르고 무조건 예절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대신 그 배경이나 이익 등을 설명해 스스로 선택하도록 열어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예절, 상황에 따라 조율할 수 있는 직장문화가 건강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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