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집값은 전세 기준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고, 월급으로 모을 수 있는 재원은 한정돼 있잖아요. 여성과 나눠 부담하더라도 돈은 결국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테고, 결정적으로 그만큼 무리해서 서두를 필요성도 못 느껴요.” (회사원 A씨ㆍ32세)
“한국에서 결혼이란 단순히 성인 남녀가 함께 살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여성이라고 해서 가사노동, 육아전담, 경력단절을 모두 감수하거나 혹은 이걸 하지 않겠다고 투쟁해야 하는 고된 난관을 견딜 자신이 없어요. 어머니가 포기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포기할 생각도 없고요.” (회사원 B씨ㆍ27세)
비혼을 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스스로 결혼을 거부하더라도 그 배경에는 자발적, 비자발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경제적 어려움, 새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 박탈될 자유에 대한 우려, 마땅한 배우자가 없다는 현실 등의 이유다. 하지만 특히 어떤 부담이 더 무거운지에 대한 생각의 추이는 성별에 따라 미묘하게 달랐다.
리서치 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지난해 만 19~5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응답은 61.8%에 달했다. 비혼이 증가하는 이유를 묻는(중복선택) 질문에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항목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미혼남녀의 증가’(71.2%)였다. 이어 ‘자녀 양육비에 대한 부담감’(63.1%), ‘높은 주거비용에 대한 부담감’(전/월세 등), ‘결혼비용에 대한 부담감’(59.6%) 등으로 모두 경제적 부담에 관한 항목이 뒤를 이었다.
결혼이 우려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자유로운 생활이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50.4%)이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남성 응답자가 가장 많이 택한 항목은 ‘본인 월급으로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감’(56.7%)이 1위, ‘결혼 비용에 대한 부담감’(47.3%),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감’(46.1%)이 뒤를 이었다. 여성 응답자의 경우 ‘자유로운 생활이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59.5%)이 가장 컸고, ‘새로운 가족 관계에 대한 부담스러움’(58%),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감’(43.7%)이 2위, 3위에 각각 올랐다.
남성들은 주로 집값 및 비용 마련, 생계부양 등을 걱정하는 반면, 여성들은 가사노동으로 인한 자유의 박탈, 시댁과의 관계, 독박육아 등을 경계하는 셈이다. “연애 중이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결혼 제도를 감당할 자신이 없고, 서로에게 짐이 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회사원 김준호(30ㆍ가명)씨나 “가부장제로서의 결혼을 거부하겠다는 결심을 10대 때부터 했다”는 여행사 대표 최영은(50ㆍ가명)씨가 대표적이다.
최씨는 “여성이 결혼 후 거의 모든 가정사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불균형의 장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남들은 비혼더러 이기적이라고, 철이 없다고들 쉽게 말하지만 저는 사회문제에도 적극 참여하고, 사업을 일으켜 고용도 창출했거든요. 늘 긍정적으로 살고 제 삶에도 만족하고요. 혼자 있기 싫다고,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이것들을 다 포기하기엔 구속, 부자유의 무게가 너무 컸어요.“
그렇다고 관계의 부담이 꼭 여성들에게만 무거운 것은 아니다. 회사원 박현우(31ㆍ가명)씨는 “비용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일이 고된 편이라 일과 후 누군가를 추가로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상태”라며 “특히 한국에서의 결혼은 개인의 만남이라기보다 가족과 가족의 결합 성격이 강한데 여기까지 신경 쓰거나 조율해 나갈 자신도 없다”고 했다. 그는 비혼을 “상대방의 가치는 무시하고 남에게 ‘표준 결혼’만을 권장하려 드는 질서에 대한 반대이자 거부”라고 정의했다.
고된 업무와 일상에 부대끼다 보니 외롭기는커녕 추가적 관계가 되레 버겁다는 얘기다. 뉴욕대 달튼 콘리 교수는 이런 관계피로에 대해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고독하고 싶어도 도저히 홀로 있을 수 없어 경험하는 고독의 종말”이라고 했다. “엄청난 데이터, 정보, 관계, 욕구, 노동을 헤쳐나가는 데 에너지를 모조리 뺏겼기 때문에 일과를 마친 뒤에는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양육의 무게도 가벼울 리 없다. 남녀 응답자 모두에게서 세 번째 우려사항으로 꼽힌 것은 ‘육아’의 부담이다. 비혼자들은 간접 경험을 통해 육아의 부담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숱하게 익혔고, 그 고단함의 해결도 당분간 요원해 보인다고 입을 모은다. 홍보회사 임원인 강지윤(43ㆍ가명)씨는 “‘오늘도 야근한 우리 엄마 힘내세요’ 같은 문구를 내 자식의 일기장에서 읽으며 애처로워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빠듯한 월급으로 치솟는 주거비를 충당하고 나면, 엄마의 마음으로 돌봐주실 베이비시터를 구할 급여는 언감생심이에요. 솔직히 저에게 비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예요. 라이프스타일이나 통장잔고를 고려할 때 우리 부모님 세대 같은 부모는 절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해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세상”이라는 그는 이런 이유로 반려견도 키우지 않는다. 혼자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반려견에게 미안해서, 또 얽매일 시간이 없어서다. 그는 결혼보다는 출산 가능성에 더 강한 선을 그었다. “현재 남자친구와 느슨한 동거 상태인데, 혹시 결혼을 하는 기적 같은 일이 있더라도 출산계획은 내 인생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비혼의 삶이 불행으로 점철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홀로 또 같이 충만하게 누릴 기쁨이 적잖다. 강씨는 “자신을 위해 주말을 지극히 소중하게 쓴다”며 “현모양처가 될 생각은 없지만 원할 때 하는 나를 위한 요리는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 힐링이자 취미로, 칼과 불을 쓰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주말마다 웨딩도우미 이모님 마냥 촬영장으로, 식장으로 널뛰며 주말을 반납하는 일을 10여년 전에 그만뒀거든요. 중요한 사람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축복하지만, 대개는 제가 없어도 그들의 애정전선이나 행복에 이상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요. 주말이면 신선한 각국의 음식 재료로 요리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요. 제가 다음 한 주의 삶을 버티는 건 다 이 시간 덕분이니까요.”
회사원 김준호씨 역시 자기 시간을 절실히 원하는 편이다. “주말 아침마다 자전거 타고, 오후엔 여자친구를 만나고, 저녁이면 불 다 끄고 음악을 듣습니다. 그냥 그게 너무 편하고 휴식이 됩니다. 결혼만 서두른다면 이런 시간은 불가능했겠죠.”
반대로 여행사 대표 최씨는 네트워킹 이벤트, 자원봉사, 운동 등으로 사람들에 둘러 쌓인 시간을 보낸다. 하루는 헬스와 수영으로 시작하고, 주말에는 지역사회 봉사와 모임으로 일정이 꽉 차있다. 그는 ”창업 여성과 비즈니스를 주제로 한 네트워킹 이벤트 두 가지는 직접 주관하고 그 외에도 여러 모임에 참여하는데, 각 분야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보내는 시간을 여가로 즐기고 있다”고 했다. “만약 다른 것에 얽매였다면 사업 발전도, 사회 참여도, 자원 봉사도 훨씬 제한적이었을 것 같아요. 남들은 자녀 한두 명만 키우지만, 저는 더 넓게 세상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해요. 비혼인 덕분에요!”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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