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 서울 등 수도권에 갑자기 대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실제 상황입니다. 경계 경보를 발령합니다”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당황한 시민들은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며 생필품 사재기에 들어갔고 정오를 넘기면서 거리에는 사건 진상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졌다.
이날 오전,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북한 국적의 미그 19기 1대가 편대를 이탈해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고도를 낮춘 채 시속 920km의 최고속도로 북방한계선을 넘자 우리 공군은 즉시 요격태세를 갖춘 F5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연평도 상공에서 맞닥뜨린 일촉즉발의 상황은 미그기가 양 날개를 흔들며 항복 의사를 보이면서 일단락됐다.
사건의 주인공은 북한 조선인민군 공군 조종사 이웅평 상위(대위)였다.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비행사였던 그가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동해안에 떠내려온 삼양라면 봉지의 “파손, 불량품은 교환해 드립니다”는 문구에 충격을 받고 남하했다지만 그보다는 북한 최고 존엄 김일성 사진을 실수로 훼손한 후 귀순을 결심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환영 열기는 대단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호재 중 호재였다.
미그기를 몰고 온 대가로 10억 원이 넘는 보상금이 주어졌고 폭우 속에 열린 여의도 시민환영대회에서는 1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함성을 쏟아냈다.
북한에서의 조종사경력을 인정받은 그는 그해 5월 대한민국공군 소령에 임관돼 제2의 ‘빨간 마후라’ 생활을 시작했지만 14년에 그쳤다. 결혼을 하고 대령까지 진급했어도 북에 남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심적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97년 간경화 판정을 받고 5년여의 투병 끝에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두 벌의 군복이 가져온 부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1983년 2월 25일, 전쟁을 알리는 공습경보 소동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웅평씨의 삶과 죽음은 분단국가의 현실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손용석 멀티미디어 부장 st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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