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 문명고 1학년 입학 예정인 학생은 184명이다. 그들이 다니게 될 문명고는 전국 5,564곳의 중ㆍ고교 중 유일하게 역사 국정교과서 연구학교로 지정됐다. 올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새로 입학하는 1학년생들에게만 적용되는 교과서이니, 문명고 내에서도 국정교과서로 수업을 듣게 되는 학생들은 이들뿐이다. 어림잡아 전국 중ㆍ고교 학생 2만명 중 1명 꼴이다. 이제 열 여섯 살. 그들은 “왜 우리만 국정교과서 실험 ‘마루타’가 돼야 하는 거냐”며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연구학교 지정을 강행한 이 학교 교장, 그리고 재단 이사장은 ‘선택의 자유’를 말한다. 국정교과서가 기존 검정교과서와 비교해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게 아니냐, 제대로 책을 보지도 않고 ‘박근혜 교과서’ ‘최순실 교과서’라고 무조건 반대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관련기사 ▶ 문명고 이사장 “연구학교 강행… 전학 할테면 해라”)
하긴 이들의 말처럼 반대 피켓을 든 학생과 학부모들이 국정교과서의 편향성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표현 차이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박정희 시대는 정말 편향적으로 미화되고 있는 것인지 면밀히 따져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최종본에조차 800건이 넘는 오류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면 이제라도 고치면 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혹은 애써 외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국정교과서의 정당성을 담보해주진 않는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또 학부모들이 거부하는 건 국정교과서 그 자체다. 설령 100% 완벽한 교과서를 만들었다 쳐도, 정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거부할 이유는 충분하다. 문명고 학생회 학생들은 다음 아고라에서 연구학교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하며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고 살고 있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역사입니다. 국정교과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지는 검정교과서가 좌편향돼 있다는 것인데, 오직 한 가지 시선으로 쓰이는 외눈박이 교과서가 현 정권의 입김에 휘둘리고 편향될 가능성이 더 큰 것 아닙니까?’
문명고 교장과 재단 이사장의 선택을 ‘선한 의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더 큰 이유는 교육 현장의 리더로서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다. 99.99%가 반대하는 국정교과서를 단지 교장이 선택했다는 이유로 수업시간에 펼쳐놓고 배워야 하는, 그래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느껴야 하는 학생들의 심적 자괴감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일 수 있다. ‘촛불’을 드는 것이 옳다고 믿는 학생들에게 ‘태극기’가 무조건 옳다고 손에 쥐어주며 광장에 나갈 것을 강요하는 격이다. 오죽하면 그들이 입학도 하기 전에 전학을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내몬 건 국정교과서에 대한 집착을 끝내 버리지 않고 연구학교를 밀어붙여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한 교육당국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연구학교 신청이 저조한 것을 두고 “소위 전교조 등 일부 시민단체의 외압 때문”이라고 했다. 벌써 1주일이 넘도록 운동장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학생들의 진심조차 전교조에 의해 세뇌된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정교과서로도 얼마든 아이들을 세뇌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을 터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부처 조직을 찢었다 붙이기를 반복하는 행태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보지만, 그래도 수술대에 오를 건 올라야 한다. 교육부가 그 중 하나라는 건, 이번 국정교과서, 특히 문명고 사태에서 다시 한번 확인됐다. 이대로 둔 채 내년에 국정과 검정교과서 혼용이 실시되면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국정교과서의 ‘마루타’로 떠밀릴지 모를 일이다.
이영태 정책사회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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