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국에 태극기를 1년 내내 달자는 것은 좀…”
경남 양산에 사는 김미자(42 가명) 씨는 최근 아파트 게시판을 보고 당황했다. 국경일인 3.1절을 앞두고 태극기를 아예 365일 게양하는 게 어떻겠냐는 찬반 투표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3.1절을 계기로 내세웠지만 자칫 잘못하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모임에서 태극기를 앞세우는 만큼 탄핵을 반대하는 의사표시로 비칠 수 있을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관리사무소측에서는 “지난해부터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논의가 됐고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왠지 개운하지 않았다. 김 씨는 “가뜩이나 민감한 시점에 모든 세대가 태극기를 달고 있으면 오해 받을 여지가 충분하지 않겠느냐”며 “3.1절에도 태극기를 달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게시판에 김씨와 같은 의견들이 이어졌고 급기야 이 찬반투표는 중단됐다.
박 대통령의 탄핵 정국과 맞물려 태극기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탄핵과 관련,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임박한 가운데 태극기 게양이 자칫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바로미터로 인지될 공산이 높다는 점에서다.
태극기 게양 딜레마는 다른 지역에서도 감지됐다. 경기 수원의 한 아파트 커뮤니티에서도 태극기 게양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이 아파트에서는 최근 3.1절을 앞두고 단지 울타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 아파트 커뮤니티에 인증 사진이 올라오자 “시기상 좋아 보이지 않는다”, “너무 과하면 역효과가 난다” 등의 부정적 의견이 이어졌지만 입주자 대표는 “부정적인 시각을 예상했으나 좋은 뜻을 나쁘게만 바라보려고 한다”며 소신껏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인터넷에서도 태극기 게양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게양한 박수환(32ㆍ가명) 씨는 “보수 단체 회원이라는 오해를 받을까봐 이번 3.1절에 태극기를 달아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살펴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3.1절 태극기 게양을 결정하지 못했다.
물론 3.1절 태극기 게양에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대학원생 김진영(27) 씨는 이번 3.1절에도 태극기를 내 걸 계획이다. 김 씨는 “태극기는 국가를 위한 것이지 한 집단, 혹은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태극기를 다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회사원 유지혜(29) 씨도 “태극기 게양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안타깝다”면서 “시국에 개의치 않고 태극기를 달 계획”이라고 말했다.
태극기와 함께 노란 리본을 달겠다는 의견도 있다. 박연주(35ㆍ가명) 씨는 “태극기는 게양해야 하지만 괜한 의심을 받을까 봐 세월호 참사와 관련 있는 노란 리본을 떠올렸다”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방법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지식인들은 태극기 게양의 본질적인 의도가 훼손되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고 지적한다. 태극기는 이념과 세대를 떠나 통합의 수단이 돼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성경륭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태극기는 정치 공동체에 중요한 상징이고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정 집회에서 도구화하는 걸 지양해야 한다”며 “그렇다고 해서 국경일에 당연히 달아야 할 태극기 기피 현상도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윤한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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