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반대 집회 상징으로 변질
‘특정 정파 대변하는 도구’ 시선
게양 독려하던 분위기 사라져
일부선 태극기 훼손하는 사례도
‘태극기는 나라사랑, 우리 모두 3ㆍ1절 태극기 달기에 동참합시다!’
직장인 박모(41)씨는 며칠 전 아파트 화단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매일 뉴스에서 보던 ‘태극기집회’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씨는 “태극기가 등장하는 탄핵 반대 집회 탓에 일종의 선입견이 생긴 것 같다”며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국경일이면 종종 태극기를 달았는데, 이번 3ㆍ1절에는 어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최근 “태극기만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태극기가 주말마다 열리는 탄핵 반대 집회의 상징이 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보수단체 등에서 태극기를 정치적 의미의 ‘애국 보수’와 동일시하면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국기(國旗)가 아닌 특정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도구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민관이 모두 태극기 게양에 거부감을 표하거나 머뭇거려 대한 독립을 위해 온 겨레가 태극기를 들고 분연히 일어섰던 기미년의 참뜻마저 훼손될 처지에 놓였다.
태극기 게양 독려 분위기도 주춤하다. 오히려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주민센터 등엔 항의전화가 오고 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한 아파트 주민 조모(27)씨는 “이미 각 동마다 태극기를 걸어놓은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 관리사무소에 항의했다”며 “집집마다 태극기가 걸리면 보수 단체에서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해준다고 생각할까 봐 당분간은 국경일에도 태극기를 달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는 매년 3월 1일 열고 있는 ‘3ㆍ1 만세의 날 거리축제’ 방식을 두고 올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시민 200~300명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3ㆍ1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인데, 태극기를 안 들면 어떠냐는 내부 의견이 나온 것이다. 하필 비슷한 시간에 탄핵 반대 집회가 예정돼 있는 점도 걸렸다. 종로구 관계자는 “고민 끝에 태극기를 사용하기로 했지만 탄핵 반대 집회로 오해 받을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태극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뒤틀린 것뿐 아니라 태극기 자체가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26일 충북 청주시에서는 탄핵 반대 집회를 목격한 20대 A씨가 “태극기는 이런 집회에서 사용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라며 태극기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질러 경찰에 입건됐다. 국가를 모독할 의도로 국기를 훼손하면 국기모독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오죽하면 광복회가 나섰을까. 광복회는 27일 “선열들이 소중히 여겼던 태극기가 특정 이익을 실현하려는 시위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예의도, 도리도 아니다”라며 “국기는 구성원들의 화합과 단결을 상징해야 하는데, 국민 분열을 야기시키는 데 태극기가 사용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3ㆍ1절은 전 민족이, 전국 각지에서, 이념과 상관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오직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폭압에 맞선 날이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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