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외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저는 일곱 살, 그는 열일곱 살쯤이었어요. 비디오를 보여준다는 그를 따라 외삼촌 집에 갔다가요. 저를 위협한 그의 말과 행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에게서 벗어나 정신 없이 엄마를 찾아 다녔어요. 제일 좋아하던 빨간 구두가 벗겨진 것도 모른 채로요. 엄마를 금세 만났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부모님이 알면 저를 버릴 것 같아 두려웠어요. 아빠는 엄마를 자주 때렸고, 엄마는 그럴 때마다 저와 동생을 고아원에 갖다 준다고 화풀이를 했거든요.
엄마 앞에서 울고 있는데 그가 빨간 구두를 들고 나타났어요.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요. 저는 지금도 구두를 절대 신지 않아요. 동생까지 그에게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성추행 당한 건 한참 뒤에 알았어요. 부모님께는 비밀로 했고요.
학교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왕따를 당했어요. 고등학교 때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야단치는 엄마에게 그 일을 전부 말해버렸어요. 엄마는 입을 닫아버렸어요. 저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 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며칠 뒤 엄마는 아빠가 알면 이혼당할지 모르니 덮고 살자고 했어요. 대신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엄마에게 정말로 버림 받은 것 같아 학교를 자퇴해 버렸어요. 그 뒤로 우울증, 공황장애, 강박증 등을 앓고 두세 번 자살 시도를 했어요.
지난해 아빠가 그 일을 알게 됐어요. 아빠는 불 같이 화를 내면서 엄마를 탓했고 엄마는 아빠를 원망했어요. 저와 동생은 이제라도 법적 조치를 해서 그가 처벌받게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숨기자고 했어요. 친척들이 알면 다시는 고향에 못 내려간다는 이유로요. 결국 친척들이 모여서 합의하고 저와 동생에게 무조건 따르라고 했습니다. 25년 전에 일어난 일이니 매년 100만원씩을 쳐주겠다면서 외삼촌이 합의금으로 2,500만원을 줬어요.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가 단과대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노력하면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갖게 됐어요. 하지만 그 일로 제가 더러운 쓰레기가 됐고 제 인생이 망가져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그날 그를 순순히 따라간 저를 자책하며 삽니다. 이제라도 그를 벌받게 하고 싶어요.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완강한 부모님이 걸리네요.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 가야 할까요?
(박윤영씨ㆍ가명, 33세, 회사원)
“윤영씨! 그날 그 순간에서 살아 나와 줘서, 지금껏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할게요. 윤영씨는 용감한 생존자입니다. 용기 내서 사연 보내 준 것도 고마워요. 윤영씨를 으스러지도록 꽉 안아 주고 싶네요. 윤영씨가 너무나 가엾네요. 몸도 마음도 얼마나 아팠나요. 얼마나 두려웠나요. 가해자가 들고 나타난 빨간 구두는 윤영씨 자신입니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윤영씨이자, 부모님에게도 편하게 얘기하지 못한 윤영씨의 마음입니다.
윤영씨 같은 피해자들이 참 많아요. 성폭행과 성추행은 사람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엄청난 범죄입니다. 성폭행을 당하는 아이들은 사망할 수도 있어요. 사람들은 성폭행과 성추행을 구별하지만, 피해들이 느끼는 고통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맞으면 부모에게 당당하게 얘기하지요. 성범죄를 당한 아이들은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평소 부모와 관계가 좋았던 아이도요. 한국 사람들은 성범죄 피해자를 ‘진짜 피해자’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거든요. 때문에 성범죄를 당하면 스스로 더러운 사람이 됐다고 여기기도 하고요.
하지만 성범죄를 당하는 건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느닷없이 닥치는 일이라 예상할 수 없고, 피해자가 기여한 일도 아니고, 또 잘못하면 피해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요. 뺑소니를 당하면 가족과 이웃들이 나서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잡겠다고 나서지요. 반면 성범죄는 숨기려고 합니다. 그런 인식 차 때문에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입게 돼요.
성범죄 트라우마에서 빨리 회복하려면 가해자를 잡으려는 적극적인 노력부터 해야 합니다. 드러내 놓고 얘기하고 전문가 도움도 받게 해야 해요. 뺑소니 피해자를 당연히 병원에 보내는 것처럼요. 그런 과정을 통해 ‘너는 피해자일 뿐, 잘못이 없다. 너를 믿고 사랑하는 우리가 너를 지켜주겠다’고 피해자를 안심 시킬 수 있어요.
윤영씨는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에 가족에게 그런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윤영씨 가족과 친척들은 윤영씨 같은 피해자에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습니다. 가해자가 가족이나 친척 중의 한 사람일 때 벌어지곤 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온전하게 피해자의 편이 돼 주지 않아요. 어머니의 반응에는 가해자가 자기 오빠의 아들이라는 점도 영향을 줬을 거예요.
윤영씨 가족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선명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는 가족 내 가해자입니다. 어머니는 피해자인 동시에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은 가해자이고, 윤영씨와 동생은 피해자지요. 윤영씨는 모든 인간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별할 겁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과 언제나 억울한 일을 당하기만 하는 사람으로요. 그래서 세상을 믿지 못하고 가족에게 보호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제일 많이 느낄 때는 언제일까요. 어떤 조건과 상황에도 부모가 자신을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로 여긴다는 느낌을 받을 때입니다. 윤영씨가 10여년 만에 털어놓았을 때, 어머니는 그런 부모가 돼 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모든 것을 밝히고 너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했더라면 좋았겠지요.
어머니가 윤영씨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을 거예요.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에게도 안쓰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가정 폭력에 장기간 노출된 사람은 스스로 존엄성을 잃고 판단력도 떨어지거든요. 물론 그런 어머니로 인해 윤영씨가 더 큰 2차 피해를 입은 것은 분명합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그 누구도 윤영씨 앞에서 ‘나도 힘들었다’고 감히 얘기할 순 없어요.
윤영씨는 그야말로 죽고 싶을 만큼 아팠을 겁니다. 그 고통을 몰랐거나 알고도 위로해주지 않은 사람들이 뒤늦게 나서서 윤영씨는 쏙 빼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어이없고 괴로웠나요. 부모님이 윤영씨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고향을 우선순위에 놓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또 윤영씨가 엄청난 아픔을 안고 살아야 했던 1년의 가치가 100만원밖에 안 되다니요. 그렇게 윤영씨의 자아와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돼 왔기 때문에 더더욱 상처가 아물지 않는 거예요.
사람이 엄청나게 두려운 일을 겪게 되면 다시는 그 일을 겪지 않으려고 그 일을 반복적으로 되새기고 생생하게 기억해 내고 끊임 없이 자기 행동을 후회합니다. 윤영씨, 이제 그러지 마세요. 그 날 그 상황에서 살아 나온 것만으로 윤영씨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윤영씨를 환영하고 반기고 칭찬해 주고 싶어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으세요. 윤영씨가 부족한 사람이라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일을 겪으면 원래 그렇게 해결해 나가는 겁니다. 성범죄 피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상담 센터를 찾아가 보세요. 법적 조치에 대한 자문도 받을 수 있어요. 이미 합의를 했다 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올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해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해요. 그 과정에서 윤영씨가 소중한 존재이고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걸 자각하는 게 중요해요.
부모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님과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친척들 사이에 분란이 벌어질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어린 윤영씨가 당한 고통, 지금의 윤영씨가 겪는 좌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빨리 독립해서 윤영씨 인생을 사세요.
안정을 찾고 나면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활동을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권할게요. 무엇보다 윤영씨 스스로에게 위로와 치유가 될 거예요. 윤영씨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사람들을 돕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이기도 하고요. 윤영씨가 이렇게 사연을 보내 준 것만으로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줬잖아요.
어릴 때 입은 상처가 오랜 기간 방치되면서 윤영씨 마음엔 커다란 빈 공간이 만들어졌어요. 그걸 채워 나가는 일을 시작하세요. 윤영씨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네요. 그리고 윤영씨는 결코 더러워지지 않았어요. 인간의 존엄성은 그런 폭력과 범죄로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마세요.”
취재ㆍ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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