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화두를 들고 수행에 집중하는 간화선(看話禪)은 불교에 약일까, 독일까. 수행자들이야 그 깊은 뜻에 감탄하고 강신주 같은 대중철학자들도 해설서를 펴내지만, 일반인들에겐 그냥 알쏭달쏭 말장난처럼 보여 불교를 더 멀리 하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계간지 불교평론 2017년 봄호에 실린 박건주 박사의 ‘추사 김정희의 선불교 인식’ 논문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룬다. 한마디로 추사는 간화선을 내세운 선불교적 경향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얘기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정치적 불운에 시달린 추사(1786~1856)는 반나절은 책 읽고 반나절은 참선하는 생활을 하는 등 스스로가 스님처럼 살았고, 죽기 전엔 지금 서울 강남의 봉은사에서 삭발수계하기도 했다.
추사는 이 과정에서 불교를 깊게 연구한 뒤 파격적 주장을 내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한 비판이다. 삼처전심이란 제자 가섭이 들어서니 부처가 자신이 앉은 자리 반쪽을 내주었다는 분반좌(分半坐), 부처가 연꽃을 드니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아보고 웃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 부처 열반 뒤 가섭이 관에 다가가니 부처가 두 발을 내보였다는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말한다. 가섭이 명실공히 부처의 제1제자인 근거이고, 부처의 가르침은 글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이처럼 은밀한 깨우침으로만 전달된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말이 쓰이는 된 계기로 꼽힌다.
그런데 추사는 19세기에 이미 삼처전심에 대해 불교 경전 상에서 명확한 증거를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모두 명확한 증거가 없으며 곧 마음으로 억조(臆造ㆍ억지로 지어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삼처전심에 대해 “이는 다 종잇장 위의 빈말”이라며 “입에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차츰차츰 미혹에 빠지고 만 거외다”라고 강하게 성토해뒀다. 박 박사는 실제 삼처전심 얘기의 출처를 따져보기 위해 불교경전을 뒤져보면 아무리 후하게 쳐도 당나라 중반 이전으로는 소급하기 어렵다는 현대의 연구결과도 함께 소개해뒀다.
그렇다면 삼처전심은 어떻게 신화가 됐는가. 부처 생존 당시 가장 존중 받은 제자는 사리불과 목련존자였다. 이들이 부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처 이후 신도들의 구심점으로 가섭이 지목됐다. 이 때문에 가섭을 지나치게 높이는 경향이 시작됐다. 이후 선불교 경향이 강화되면서 가섭이 신비화 되어버렸다고 분석했다. 박 박사는 “추사가 삼처전심의 허구성을 주변에 알리고자 한 것은 대단히 선구적인 쾌거로 그것을 보배처럼 떠받들어온 조선불교계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 평가했다.
오늘날 불교계에는 어떤 의미일까. 박 박사는 “어느 사회에나 당대의 고질적 문제”가 있으며 “지성인이라면 이를 널리 인식시켜주어야 한다”고 말해뒀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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