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견 일주일 훑어도 소득 없어
묘지 혈흔만 “아내 김씨 것” 입증
남편 한씨 車 1주일 넘게 역추적
장갑ㆍ기름통 구입 등 단서 얻어
얼음 깬 하천서 뼛조각 찾았지만
불 타버려 유전자 분석조차 못해
1월 2일 강원 춘천에는 초속 3.5m의 남서풍이 불었다. 빗방울이 약하게 날렸고, 기온은 2.8도로 평년(영하 4.3도)보다 높았다. 밤사이 얼었던 물방울은 낮이 되면 녹았다, 해가 지면 다시 얼었다. 김모(51)씨가 자신의 은색 승용차를 타고 오후 2시50분쯤 오빠의 묘가 있는 D공동묘지에 나타났다. 검은 승용차로 먼저 와있던 남편 한모(53)씨가 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김씨가 사라졌다. 묘지에는 까마귀가 울어댈 뿐, 인적이 드물었다. 월요일에 묘지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음날 묘지 관리인은 “사람은 안 보이고 (김씨의) 은색 차 주변에 피가 있다”며 112에 신고했다. 한 시간 뒤 경기 남양주경찰서에 “전날 춘천에 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 새 아버지 한씨가 납치한 것 같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주변인들은 한씨의 가정폭력, 사업 난항, 김씨 오빠 묘 이장 비용 문제로 인한 부부 다툼 등을 진술했다. 한씨만 반대했던 이혼 소송까지 더해지면서 모든 정황은 “한씨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확신할 수 없었다. 진술 외 물증은 묘지에서 다량의 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했는가’라는 무한대에 가까운 빈칸이 강원경찰청 과학수사요원들 앞에 던져졌다. 경찰 안팎에서는 이 사건을 ‘춘천 시신 없는 살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기온, 바람, 야생동물… 사방이 ‘감식의 적(敵)’
시작점인 묘지는 최악의 감식현장이었다. 살인 사건 수사의 ‘시작과 끝’인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범인이 상처를 입힌 방법도, 부위도 알 수 없었다.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우의 수가 셀 수 없이 확장되는 상황. “현장의 모든 것이 단서라는 말은 단서가 아무 것도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현장이 누구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공개된 야외(野外)라는 점이 과학수사요원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나마 기댈 건 혈흔이었다. 요원들은 “단초가 되길” 기대했다. 혈흔은 세 곳, 묘지 꼭대기에서 아래로 두 번째 구역 진입로와 인근 벤치, 잔디밭에서 발견됐다. 현장감식을 지휘한 권영일(51) 강원경찰청 광역과학수사대 1팀장은 주변 반경 10m 이상에 폴리스라인을 둘렀다. 범인 동선을 가늠할 수 없었기에 ‘현장’을 더 좁힐 수는 없었다. 범위가 넓어진 만큼 감식 시간은 늘었다. 피해자 생사도 모르는 초반 상황에 4명으로 시작한 감식은 7명으로 증원됐고, 강원경찰청에서 현장감식을 할 수 있는 15명 전원이 투입됐다. 폴리스라인 바깥은 수색견(犬)이 일주일 가까이 훑었다.
“감식 자체가 사건 발생 하루가 지나서 시작됐고, 그 하루 동안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현장에 투입됐던 감식 담당자는 당시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떨어졌을지 모를 머리카락 따위는 찾을 확률 자체가 낮았다. 현장에서 담배꽁초 두 개와 씹다 버려진 껌을 수거했지만 한씨의 유전자는 나오지 않았다. 다른 누가 다녀갔는지도 모르고, 언제 누가 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햇빛조차 원망스러웠다. 혈흔분석 전문가인 김성민(44) 경사가 찾은 어떤 핏방울은 10도가 넘는 일교차에 얼녹기를 반복했다. 그는 “새벽에 내린 이슬이나 습기에 젖은 혈흔이 얼었다 녹으면서 형태가 변하고 희석됐다”고 했다. 피 냄새를 맡았는지 까마귀도 현장을 다녀갔다. 진입로 반대편 연석(沿石·도로와 인도 경계석) 위에 녀석의 붉은색 발자국이 남았다. 조류매개흔(새들이 옮긴 혈흔)을 본 것은 김 경사도 처음이었다. 사건 단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판단에 따라, 따로 분석은 하지 않았다. 까마귀가 혈흔분석을 방해할 만큼 현장을 훼손하지는 않았다는 걸 안도할 뿐이었다.
묘지 현장감식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직접 증거 등 뜻밖의 실마리를 기대했지만, 1차 결과는 ‘현장에 떨어진 피는 김씨의 것’이라는 예측 그대로였다. 유력한 용의자 한씨의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현장감식은 ‘허망했다.’ 1월 4일 경기 양평에 버려진 한씨 차량에서 김씨의 혈흔이 발견된 것을 감안하면, 만일 한씨 혈흔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면 그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요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시간이 흘러갔다. 5일 붙잡힌 한씨 내연녀는 사건 발생 당일 밤 만난 한씨 옷에서 “탄 냄새” 가 났다고 진술했다. ‘살해 후 혹시?’ 잔혹한 기운이 드리웠다. 하지만 같은 달 9일 검거된 한씨는 “묘지에 있을 때 차 안에서 김씨와 다퉈 때린 것은 맞지만 내려 준 뒤에는 행방을 모른다”는 취지로 부인했다. 한씨 진술을 반박할 단서를 찾지 못한 요원들은 속이 타 들어갔다. 그리고 사건 발생 10일 만에, 또 다른 현장이 나타났다. 재도전이었다.
인근 폐가서 피 묻은 헤드셋
부엌에 시약 뿌리자 푸른 빛이…
한겨울 현장감식 땀방울 ‘결실’
한씨 “장작 쌓고 시신에…” 실토
“폐가로 들어서는 순간, 기뻤다”
1월 12일 한씨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갑과 기름통이 강원 홍천의 산골짜기 도로변 하천에서 발견됐다. 홍천과 춘천 일대 경찰이 일주일 넘게 한씨의 차량이 찍힌 폐쇄회로(CC)TV 화면 등을 일일이 분석하면서 역추적한 결과물이었다. 탐문 조사를 통해 한씨가 철물점에 들러 장갑과 기름통을 사고, 이후 주유소에서 등유 40ℓ를 구입한 사실을 파악해 둔 상태였다. 동일한 물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확신대로 장갑 겉에서 김씨 혈흔이, 안쪽에서 한씨 유전자가 검출됐다. 실마리가 마침내 손에 잡혔다. “수사가 한씨 턱 밑까지 다다른 순간”이었다. 하천 가장자리에서 불에 탄, 작게는 새끼손톱 절반만한 탄화물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정(44) 검시관은 “얼음을 깨고 들어간 50㎝ 깊이 하천에서 꺼낸 일부 조각 단면구조를 보고 사람의 뼈임을 직감했다”며 “김씨 시신을 찾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타 버린 뼈는 단백질 성분이 남지 않아 유전자 분석을 할 수 없었고, 당연히 누구의 뼈인지도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그때 또 다른 현장이 발견됐다는 연락이 왔다. 김씨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헤드셋’이 장갑이 나온 하천에서 차로 5분 남짓 거리에 떨어진 폐가에서 발견됐다. 쓰러져 가는 흙벽에 빛 바랜 붉은 양철지붕을 이고 있는 폐가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이 검시관은 폐가에 들어 설 때 “기뻤다”고 했다. 그는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돌아볼 여유는 없었지만 감각적으로 사건의 종결이 보이는 듯 했다”고 했다.
현장을 통제한 뒤, 김 경사와 이 검시관이 문짝이 떨어진 맨 왼쪽 입구, 부엌으로 향했다. 시신을 화장했다면, 그 곳일 가능성이 컸다. 석유 냄새가 나는 직경 1m 남짓한 오른쪽 아궁이에서 시작된 그을음이 천장까지 묻어 있었다. 혈흔 체취를 위해 루미놀(luminol) 시약을 부뚜막과 바닥에 뿌리자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다. 피였다. 이 검시관은 붓을 들고 바닥을 조심스럽게 파내려 갔다. 아직 타지 않은 근육이 붙어있는 뼛조각이 나왔다. 한씨 내연녀가 말한 ‘한씨 옷에서 난 탄 냄새’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권 팀장은 “천운”이라고 했다. 폐가 현장감식은 새벽 1시쯤이 돼서야 끝이 났다.
“김씨 유골이 맞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정밀감식 결과가 나온 16일, 한씨는 마침내 범행을 털어놨다. 공원묘지 벤치에 김씨 머리를 수 차례 쳐서 숨지게 했고, 폐가 아궁이에 장작을 쌓고 시신을 가부좌로 앉힌 다음 기름을 부어 태웠다고 실토했다. 현장감식을 통해 증거를 찾아낸, 과학수사에 한씨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화장' 장소로 택한 홍천의 폐가는 한씨가 김씨와 함께 펜션 사업을 하기 위해 둘러 본 곳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1일 춘천지법에서 한씨의 살인 및 사체 훼손ㆍ유기 혐의를 가릴, 첫 재판이 열린다.
춘천ㆍ홍천=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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