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들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분단 이후 남북한 현대사를 실증적으로 조명한 명저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의 후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저자 돈 오버도퍼는 기자 출신답게 정밀한 취재와 분석을 곁들여 이념의 틀에 갇혀 긴장과 대립으로 얼룩진 한반도 40년사를 입체적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한반도의 풍향계는 주변 강대국들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해 변화무쌍할 것이란 예측이었다. 그의 통찰은 옳았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97년에서 스무 해나 지났는데도 한 쪽의 코리아가 자행한 전대미문의 테러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김정남 암살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합적이다. 치명적 독극물로 제 피붙이를 죽인 어린 독재자의 잔혹성에 놀라다가도 혈족을 제거하면서까지 권력유지에 목을 메는 현대판 왕조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끔찍한 테러는 한낱 흥미거리로 전락한다. 요즘 해외 온라인사이트에서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어쌔신 크리드’ 포스터에 김정은 사진을 합성한 패러디물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중세를 배경으로 비밀 암살조직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데, 댓글 수만 개가 달릴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자못 비장해 보이는 김정은 표정을 떼다 붙인 합성 사진이 꽤나 그럴듯해 쓴웃음이 나왔지만 해외 네티즌처럼 마냥 즐거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 머리맡에 있는 암살단 두목이 지구상에서 가장 무서운 장난감인 핵을 쥐고 있어서다. 그런데도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이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정부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으레 그렇듯 “북한을 규탄한다”로 시작해 “국제사회와 협력하겠다”로 끝났다. 이번에도 북한을 어떻게 압박할지, 대가를 치르게 할 지렛대는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뭘 해보겠다는 고민은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은 늘 이런 식이었다. 2013년 12월 장성택이 처형되자 북한붕괴 망상에 기대 이듬해 정초부터 ‘통일 대박론’을 들고 나오더니 독일까지 날아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대규모 지원을 한 번 생각해보겠다는 ‘드레스덴 선언’이란 걸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북한은 추호도 핵을 버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북한을 변화시킬 궁리는 안하고 저절로 무너지기만 기다리는 사이, 김정은 정권은 두 차례나 핵실험을 더 했다. 미사일 발사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정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이다. 2년 전 “사드 구매는 절대 없고, 독자방어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국방부의 호언장담은 제어의 임계점을 상실한 북핵 위협 앞에 자취를 감췄다. 땜질 처방의 말로는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그대로다. 하긴 통일정책의 명운조차 비선실세의 손에서 놀아났다고 하니 애초 기대를 품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정남 죽음의 결말 역시 뻔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북한은 이미 유엔과 국제사회의 엄포에도 아랑곳 않고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응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사드로 잔뜩 뿔이 난 중국은 한국을 정신 없이 난타하는 중이다. 미국도 뒤질 새라 사드 장비 공수 장면까지 공개하면서 북중에 맞불을 놨다. 얽히고설킨 세 나라의 힘겨루기에 눌려 정작 당사자인 한국은 입도 뻥긋 못하는 형국이다. “남북한은 더 이상 국제사회 문제에 있어 수동적인 구성원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오버도퍼의 다른 진단은 그래서 틀렸다. ‘북한은 방치하고, 중국을 달래가며 미국에 매달리는’ 한국은 여전히 수동적 구성원이다.
미국이라도 확실한 믿음을 주면 좋으련만 하필 상대를 잘못 만났다. 동북아 정세가 입맛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언제 한국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칠지 모를 독불장군 트럼프에게 바람막이 역할을 기대하기는 일찌감치 글렀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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